제주4.3에서 서북청년단은 사람백정 경찰은 검정개 군인은 노랑개의
고문 강간 강제결혼
1948년4월 어느날의 제주도에서 일어난 동족 대살육 사건
그 "왜곡과 망각"이야말로 오늘 한국인들의 야만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이르는 그 긴긴 세월속에서 그 처참한 학살사건은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이 고조되기 전까지는 4·19 혁명 직후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4·3 사건에 대해 국가에 의한 공식 역사와 다른 진상이나 기억을 공개할 수 없었다."
바로 살기등등한 악질법 국가보안법은 진실에 대해 (numbing) 벙어리로 만든다.
우린 벙어리다. 제주 4.3은 우릴 벙어리로 만든다.
그냥 "좌파들의 반란" 이것 이외에 아는것이 하나도 없는 야만의 한국인들이 대다수다.
이게 야만이지 무엇이 야만일까?
그럼서 남의나라 그리고 북한의 인권유린이 나오면 지들은 무슨 선인양 한다.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이게 한국인들 레벨이다.
"니들 주제를 알라" 아마도 하나님만이 그 뜻을 알리라
동족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던 상관 친일파 박진경을 처단한 문상길 중위가 암살후 재판정에서
분명히 민족반역자놈을 처단했다고 하며 하나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받고싶다고 하며
처형되었다. "하나님만이 진실을 아는 사건이 제주 4.3이다.
국가보안법은 이걸 가능케 한 학살의 공범이며 지금도 그 연장선상이다.
곧 흑도 백이다라고 해야하는 야만법이 국가보안법의 실체다.
또 이 천인공노할 학살사건에 대해 90년대 서북청년단원은 비열하게 남 핑계로 자신의 과오를
비켜가려한다. 마치 친일매국노 간도특설대 백선엽과 똑같다.
"백선엽은 동포들을 학살 토벌한것은 일본의 이이제이에 넘어간것으로 어쩔수없는 것이다.
이 서청 출신은 동포들을 학살한것은 이승만의 권력욕에 우리가 이용 당한것이다."
참 비열한놈들이다.
그러하니 그 학살의 교관인 미군 지휘자 제임스 하우스만이 회고에서
"한국놈들은 일본놈들보다 더 비열한놈들이다."라고 왜 했는지 알만하다.
그 잔인무도한 동족 살육사건은 그 중심에 서북청년단의 인간이기를 거부한 비열함이 존재합니다.
당시로써는 점령군에 불과한 미군정의 지원과 방조 하에 자행된 집단광기적 인권유린이고
미군과 더불어 이승만은 서북청년단의 무소불위적 폭력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며 이들을 자신의
권력 장악에 이용한것입니다.
그러고보면 북한은 집권층간 권력암투가 지금까지 일관된 사건들이고 한국은 광주 5.18까지
주로 민간인들 학살 고문등으로 권력을 장악해 가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수도,,
고로 권력투쟁의 희생자가 한국이 훨씬 더 많아질수밖에,,
제주4.3의 미군측 지휘관 한국군부를 만든 장본인 독일계 미군장교 "제임스 하우스만"
이자는 한국인 학살고문현장에 언제나 나타나는 바로 그 악귀입니다.
그 장면들을 동영상으로 촬영하여 즐긴 변태적 살인마입니다.
이자는 한국인들에게 학살후 흔적을 말살하기 위해서 그 사체 처리방법에 가솔린을 어떻게 사용하는
어떻게 암매장하는지를 교범으로 만들어 교육했다고합니다.
제주 4.3에서의 이승만 사냥개들 서북청년단 경찰 군인들은 다름아닌 작금의 이라크 시리아에서
고문 강간 학살을 자행하는 IS 세력 그 모습 그대로 상상하면 딱입니다.
과거
코소보에서의 세르비아민병대, 동티모르, 아프리카 르완다등 그리고 작금의 시리아 이라크 지역의
IS 세력이 바로 과거사의 망각속 서북청년단의 정체랍니다.
군인 경찰같은 국가공권력이 아닌 민병대 성격의 "서북청년단"
바로 음험한 이승만이가 자신의 마피아 요원으로 길들인 동족 학살의 전위대 살인마들입니다.
이름하여 이들이야말로 "극우 학살 홍위병"들입니다. 모택동의 좌익 홍위병보다 몇배더 잔인무도한
사람백정들입니다.
나긋나긋 민간인들을 쫓아다니며 끈질기게 괴롭히는 이리떼같은 비열한 놈들이 바로 서북청년단입니다.
마치 이번에 병영에서 살해된 "윤일병"처럼 그 고참들의 끊임없는 괴롭힘 그런 양상입니다.
차라리 깨끗하게 죽는이만도 못한 끊임없는 비열한 괴롭힘 당해본 사람들은 알겁니다.
그 "사람백정"서북청년단원들은 주로 "북한 평안도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다수라고 합니다.
그 주범인 이승만부터 시작하여 기독교인들이 다수입니다.
오늘도 일부 극우 개신교 목사놈들에게서 이런 피냄새가 물씬납니다.그 피가 그피입니다.
어찌 이것뿐이랴 전쟁기간내내 전국 100군데 이상의 지역에서 밤새도록 트럭으로 실어다가
학살매장한 동족이 그 얼마이던가? 그 한 증거가 엇그제 방명한 SBS 그것이알고싶다다.
"대구 코발트 광산"의 의문의 뼈무덤 밤새도록 트럭으로 실어다가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을 모방한
줄로 묶어 한두사람을 총으로 쏘면 줄줄이 그 수직광산 홀로 떨어졌다.
일본군이 중국 난징대학살에서 양자강 다리위에서 그리 학살했단다. 역시나 친일파놈들이라
방식도 유사하다.
오늘
그 제주 4.3의 경찰 군인 그리고 가장 악질적인 민병대 서북청년단의 악행중에서 일부인
제주도 여성들에 대한 고문 강간 살해의 증언을 보면 그날 제주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가늠된다.
증언 1 :
나는 1949년 1월경 여러 사람과 경찰서와 헌병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경찰서에서는 손을 뒤로 묶은 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때렸어요. 헌병대로 옮겨진 후에는 전깃줄을 엄지손가락이나 뺨에 대는 전기 고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2주일 정도 수감되어 나왔지만 산에서 심부름하던 처녀들은 희생이 컸습니다.
아무개 처녀는 순경이 자신과 결혼을 하면 살려주마고 했지만 끝내 거절하여 죽었습니다.
또 아무개 처녀는 '다라쿳' 목장 부근에서 토벌대에게 잡혀 산채로 유방이 도려졌어요.
그녀는 고통을 참지 못해 땅바닥을 긁어 대 손톱이 다 빠졌고 그녀가 죽은 부근에는 잔디가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춘형(李春珩, 96년채록, 채록당시 82세)
증언 2 :얼굴이 고왔던 강상유는 명문가 집안에 시집갔으나 4 3당시 홀로 된 상태였었는데 탁대위는
강제로 그녀를 범한 후 함께 살다가 어쩐 일인지 그녀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서청단장인 김재능도 여자들을 많이 괴롭혔어요. 그는 양 아무개를 범했지만 그녀는 죽을 위기에 놓인 남동생을 살리기 위해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벌대에게 누가 당했다더라'는 소문이 퍼지면 우린 전전긍긍했어요. 당시 멋쟁이 여성들도 많았는데 무서워서 가급적 나들이도 삼갔고 일부러 바보처럼 꾸미고 다닐 정도였습니다.(강소희姜曕熙, 96년 채록, 채록당시 77세)
증언 3 : 나는 그때 마흔 두 살이었어. 경찰관이 다짜고짜 '네 서방 어디 갔나. 폭도질 하러 갔지' 하고
윽박질렀어. 내 남편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계속 살았지. 그렇게 얘기해도 주먹질이야.
경찰은 그 사이에 겁을 먹고 골방에 숨어 있던 내 며느리를 붙잡아 공회당 터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며느리를 걸상 위에 누인 후 배 위에 긴 나무를 깔아 놓고 두 놈이 통나무 양쪽에 앉아
'네 서방 간 곳을 대라'고 고문했지.
차라리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달려드니 내 뺨을 때리면서 그 짓을 계속했어.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지.
경찰은 여러 사람을 심문하다가 갑자기 한 할아버지를 불러내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또 할머니를
지목, 그 위에 올라타 마부 흉내를 내면서 빈 터를 돌게 했다.
그때 그 하르방은 60세 가량이었고 할망은 그보다 몇 살 위였어. 두 사람은 괸당(친척)이었어.
마치 하르방 말에 채찍질하라는 듯 마늘 뿌리를 할망 손에 쥐어 주더군. 할망이 머뭇거리자 또다시 윽박질렀어. 사람의 얼굴을 갖고 어떻게 그런 짓을 시킬 수 있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똑똑히 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 그런 모욕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어.(高난향, 89년 채록, 채록당시 81세)
증언 4 : 토벌대는 큼직한 장작으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어. 그러다가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홀랑 벗겼지. 나는 당시 마흔 살이었는데 체면이고 뭐고 가릴 여지가 있나. 그냥 옷을 벗으라 하니 벗을 수
밖에.
토벌대는 옷을 벗긴채 또 장작으로 매질을 했어. 그러다가 싫증이 났는지 얼마 없어서 처녀 한명과 총각
한명을 지명해 앞으로 불러내더니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짓을 강요하는 거였어.
인간들이 아니었지. 두사람이 어쩔줄 몰라 머뭇거리자 또 매질이야.
그러다 날이 저물어 가자 주민 4명을 끌고가 총을 쏘아 버렸어.(좌봉左奉, 94년 채록, 채록당시 87세)
증언 5 : 1948년 11월경 경찰서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나서 도저히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취조실로 가보니 한 여자가 나체인 상태로 거꾸로 매달려 고문당하고 있었어요.
내가 일본도를 들고 가서 화를 냈더니 취조하던 수사대원은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튿날 경찰청장에게 "최난수가 너무 한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제주 사람들은 점점 더 육지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면 사태 진압이 어려워진다"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육지 출신의 특별수사대 경감 최난수는 막무가내였습니다."
(당시 서귀포경찰서장 김호겸金浩謙, 96년 채록, 채록당시 80세)
증언 6 : 당시 친정집에는 군인 3∼4명이 임시 주둔했는데 그 중에서 '최상사'라는 놈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동생은 참 예뻤죠. 그놈들은 처음에 처녀들을 몇 명 집합시켰다가 동생이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지
덮쳤습니다. 그러나 마음대로 안되자 총을 쏜 겁니다. 동생은 배꼽 부근에 총을 맞아 창자가 다 나올
정도로 처참한 모습으로 숨졌습니다.(강경옥姜景玉, 97년 채록, 채록당시 77세)
증언 7 : 남편은 목수일을 하느라 잠시 조천리에 가 있던 48년 9월 말께입니다. 하루는 웬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는 '산에서 왔는데,
이 집에서 쌀을 준다기에 들렀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군인이었는데 함정을 판 겁니다. 난 '쌀이 없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끌어내었습니다. 2살난 딸을 데리고 나섰더니 윤현권씨 아내도 끌려나왔더군요.
우리 둘은 함덕 국민학교로 끌려갔다가 송당리 군인 주둔지로 넘겨졌습니다. 군인들은 '거슨새미오름'
주변에 천막을 치고 주둔했는데 숫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난 그곳에서 보름간 고문 받았습니다. 뒤로 몽둥이를 끼운 채 무릎을 꿇려 놓고 위에서 마구 밟았습니다.
지금도 잘 걷지 못해요. 임신했다고 사정했지만 통하지 않았어요. 결국 유산됐습니다.
난 다시 제주읍내 농업학교로 옮겨져 보름 가량 감금됐다가 풀려났습니다.
(차경구車慶九, 96년 채록, 채록당시 77세)
증언 8 : 대부분 토벌을 갔지만 마을을 지키기 위해 경찰 몇 명이 남이 있었습니다. 경찰은 민보단과 부인
회원을 모이게 한 후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 여인은 난산리 출신으로서 신풍리에 시집간 사람인데
남편이 산에 오르자 자기 친척이 있는 우리 마을에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만삭인 상태로 와서 아기를
낳았지요. 경찰은 그 여자를 발가벗긴 후 민보단원과 부인 회원들에게 창으로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총으로 쏘았습니다. 생후 한 달이 안된 아기가 죽은 엄마 옆에서 버둥거리자 경찰은 아기 얼굴에 대고
또 한 발의 총을 쏘았습니다.(김원형金元亨, 97년 채록, 채록당시 87세)
증언 9 : 엿장수나 하던 서청들이 무장을 하게 되면서 희생자는 속출했습니다. 난 교사로서 주정 공장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창고 안에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장면이 벌어졌습니다.
남녀를 불러내어 구타하면서 성교를 강요했고 여자의 국부를 불로 지지기도 하였습니다.
밤에는 썩는 냄새로 잠을 못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내가 살아나게 된 것은 정 아무개 선생 때문입니다.
정선생은 나의 약혼녀였는데 그 선생이 차 아무개란 서청 간부와 결혼해서 나를 살려준 겁니다.
날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자신을 겁탈하려던 서청원과 결혼한 것입니다.
불행하게 살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는데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홍경토洪敬土, 97년 채록, 채록당시 70세)
그 "사람백정" 서북청년단이 21세기 2014년 대명천지에 얼굴을 처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놈들을 어찌해야하나?
이 인간백정놈들을 어찌 처단해야하나?
한국인들이여 속지마라 정신차려라 이 야만인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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