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486이라고 이름붙여야 겠지만,
그 불행했던 80년대에 청년시절을 보냈던 386세대인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대하는
수많은 국민들의 비통함과 슬픔, 그와 다르지않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숨겨진 또 다른 감정이 있다.
시청앞 광장,
어떤 이는 2002월드컵의 붉은악마를 떠 올릴지 모르겠고
또 어떤 이는 2008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을 떠 올릴지 모르겠다.
그런데 386들에게는 또 다른 기억이 있다.
1987년 '이한열'의 노제가 치뤄졌던곳.
약 100만의 시민들이 아스팔트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추모열기로 데워져
민주화를 열망하는 양심세력의 용광로가 되었던 곳.
내 비록 중무장에 실탄을 지급받고 차량 탑승대기중이었던 군인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20년이 훨씬 지난 그 때의 영상들이 노무현대통령의 노제를 지내는
서울시청 광장 한켠에 영결식을 중계하는 대형LED차량 앞에서 시종 눈물만 훔쳤다.
' 도대체 20년이 넘게 지나도 우리의 역사는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인가?'
슬픔, 분노, 절망, 여러가지 감정들이 뒤섞여 가슴이 먹먹하기만 했다.
80년대말 학교를 졸업하고, 곧이어 직장을 얻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며
내 한몸 먹고 사는 일에 전념하면서
우리의 꿈들은 퇴색해갔고, 때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함께 민주주의를 외치며 최루탄으로 범벅된 얼굴을 맞대며 담배 한개비 물면서
서로를 믿고 의지했던 선후배들을 몇년전에 오랜만에 만난적이 있다.
술 한두잔이 돌아가자, 아팠지만 그대도 아름다웠던 과거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씁씁할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화제는 '골프'로 옮겨졌고,
그날 더 이상 우리는 과거도 그리고 현실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후로 다시는 모임에 나가지않게 되었지만
나도 그들과 별로 다를게 없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소시민일뿐이다.
아이들 과외에 수입의 상당부분을 투자하고,
아파트값이 올라 돈 좀 벌었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배가 아파 잠이 오지 않았으며,
대박을 치는 해외펀드를 찾아 눈빠지게 인터넷 정보를 뒤지는
그런 소시민이 되어있었다.
김대중, 노무현이 대통령이었던 시절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에 초등학생 딸아이와 함께 차가운 아스팔트에 엉덩이를 비비고 앉아
한손에 촛불, 한손에 탄핵반대 피켓을 들었던 일이 학교 졸업이후 유일한 정치적 행동이었다.
정치는 그들에게 맞기고 나만을 위해 앞만보고 달려나가는 것이 일상이 되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갑자기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 한참 멍했었다.
그리고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아직도 내내 아무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인간적이고 소탈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내몰아버린 이 정권에 대한 분노.
그러나 결국 나는 참회하고 말았다.
한때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며 이 한몸 바칠듯 살았던 그 시절의 열정은 아니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문제들을 냉정하게 돌아보지 못한 무관심의 죄.
나, 내 가족, 내 생계, 내 취미, 내 종교의 울타리에 갖혀
소외되고 억압받는 나의 이웃들을 애써 외면한 죄.
사람사는 세상 꿈꾸며 열심히 뛰는 자들에게 돌을 던지고 비난하며,
비관적인 전망만을 늘어놓으며 어린애처럼 불평불만이나 늘어놓은 죄.
어쩌면 이것이 노무현을 부엉이바위로 밀어내게 한 원인인지 모르겠다.
이명박이 아니라, 조중동이 아니라, 이나라의 수구꼴통들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를 죽였다는 참회...
이제 386은 무엇을 할수 있을까?
참회와 성찰의 시간들은 나를 다시 건강한 상식을 지닌 시민사회의 주체로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해줄것이라 믿는다.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나에게 남긴 작은 변화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서울 시청앞 광장에 서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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