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문화의 이해.
늘 그렇듯이 새벽 2시에 잠이깨, 책을 찾았다. 무슨 책을 볼까 고민하다가 책장에 꽂힌 <이슬람문화의 이해>라는 책을 선택했다. 이 책은 무려 26년전 학교 선배에게 빌린 책이었다. 나도 오래되서 까먹고 있었다. 빌려 놓고 한번도 읽지 않았는데 26년만에 펴본 것이다. 선배님께 26년만에 사과드린다. 암튼 이 책을 펴본 이유는 요즘 관심 가는 주제가 지구촌의 ‘종교갈등’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하는데, 이슬람에 대해서만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는데 정확히 4시간 만에 속독했다.
예전에 한 무슬림을 알았었는데, 그분과 대화하다가 놀랬던 것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이슬람의 역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이게 꽤나 충격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나의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는 이슬람은 종교이기 전에 문화적 배경이다. 우리가 유교권에 나고 자랐지만 주자학에 대해 통달에 있지 않듯이, 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들도 하나의 문화로써 이슬람이 내제해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집단 무의식이 아직도 유교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평소 자세히 공부 하지 않듯이 말이다.
어떻든 오늘날 이슬람은 서구 사회와 선진 국가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디어에서 노출되는 테러리즘과 극단적 이미지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책을 보는 것이 나에게 매우 유익했다. 이슬람 문화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하게 됐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종교는 특유의 맹목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의 종교적 가르침만을 받아들이려 하고 나머지 것들은 대부분 무가치 하다는 믿음이 원인이다. 이로 인해 종교 갈등은 인류 역사에서 늘 있어왔다.
오늘날 이슬람만이 대표적인 것 마냥 호도되는데, 역사를 살펴보면 사실 그렇지가 않다. 중세 기독교 사회를 보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인 ‘십자군 전쟁’인데 역사적 기록만 살펴봐도 당시 기독교 국가가 이교도에 대해 저지른 전쟁 범죄는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종류의 극단적 종교 운동을 반대한다. 그렇다면 해결의 방법은 없을까? 몽테스키 외는 “지식은 인간을 관대하게 하지만, 무지는 인간을 비정하게 한다” 라는 말했다.
나도 동의한다. 모든 폭력은 타 문화를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맹목성과 자기 우월감에서 나온다. 보통 자기 우월감은 내가 믿는 것만이 진리라는 맹목성이 근원이다. 이 맹목성은 더 이상 배울 필요가 없다는 교만이 되고, 결국 반지성주의의 원흉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랑을 위해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지혜는 이해를 하기 위해 필요하고 이해는 관용의 폭을 넓혀준다. 그런 의미에서 지와 사랑은 하나다. 신학자 칼바르트가 신앙인들에게 “한손에는 성경을, 한손에는 신문을”이라고 설파한 이유도 이와 같은 거라 생각한다.
서론이 길었다. 이 책을 통해 그간 몰랐던 이슬람에 대한 흥미로운 정보만 몇가지 공유해 보고자 한다.
1. 평화를 사랑한다는 어원
이슬람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아랍어 쌀리마(Salima)에서 파생된 명사로 평화를 뜻한다. 이는 분쟁이나 전쟁을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2. 꾸란은 실정법이다.
오늘날 현대 종교인들이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서를 그대로 실천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지키지 않는다고 구속되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나 무슬림들에겐 꾸란은 헌법이다. 단순한 종교 성서의 의미가 아닌 것이다. 무슬림들은 꾸란의 내용을 지키지 않으면 범법 행위를 한다고 생각 한다. 더 나아가 꾸란은 22년간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은 내용을 적은 것으로 무슬림들은 단 하나의 완성된 법률로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아주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중세 기독교도 성서를 실정법으로 오랫동안 받들었다.
3. 꾸란은 무슬림의 모든 것이다.
꾸란은 논리적 수사가 아닌 마치 시문학과 같은 잠언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겐 꾸란은 늘 종교 지도자의 해석이 필요하다. 즉 꾸란은 그들의 권력을 창출하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이슬람 문명의 문학적 근원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점은 무슬림들은 꾸란의 엄격함으로 인해 아랍 세계가 통일되고 언어가 여러 갈래로 분열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즉 통일된 사상과 언어체계를 꾸란에서 받은 것이다. 우리가 훈민정음을 통해 민족 정신을 함양하듯이 말이다. 즉 꾸란은 20억 무슬림들에게 모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꾸란을 모욕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쏟아내는 이유다.
4. 무함마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그들의 창시자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문맹인이었는데, 어느날 알라의 계시를 받는다. 그것을 설파하면서 이슬람 종교가 창시되었다. 무함마드는 평화를 지키라고 가르쳤고, 사회적 차별을 금기시 했다. 당시 귀족들은 천민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싫어했으나, 무함마드는 “신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초기 이슬람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는 초기 기독교와 초기 불교의 패턴과도 매우 유사한 것이다.
그리고 무함마드는 돈을 모으면 노예 신분에 있는 사람을 돈으로 사서 그들을 해방시켜주었다고 한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못하면 노예를 한명 해방해야 한다는 원칙이 생겨났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자신은 신의 전달자일뿐 절대로 신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저 인간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사후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지 말고 초상화도 그리지 말라고 엄격하게 금지했다. 자신이 우상을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래서 현재 이슬람 사회에 무함마드와 관련한 그 어떤 그림도 없는 것이다. 서구 언론에서 무함마드 만평을 그려 놓을 때 왜 그들이 그토록 분노했는지 이해 할 수 있는 대목이다.
5. 모세와 예수를 인정한다.
유대교는 모세만 인정하고 기독교는 모세와 예수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모세, 예수 , 무함마드를 모두 인정한다. 심지어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낳았으며 메시아로 왔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예수의 재림도 인정한다. 띠용!! 완전히 몰랐던 사실이다. 이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게 알라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 기독교는 무함마드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쫒기는 무함마드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기독교인들이 형제의 종교라고 생각 했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이슬람은 예수의 신성은 부인한다. 그도 선지자로서 왔다는 것이고 알라와 동격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신약과 구약 모두를 인정하나, 다만 역사를 거치면서 많은 여러명의 필자로 인해 왜곡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최종 경전은 무함마드가 총정리한 ‘꾸란’으로 완성된다.
6. 철학적 근원
이들의 철학 체계도 다른 유일신 종교와 같이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의 개념아래 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정립했고, 중세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체계적으로 완성된 철학 개념이다. 철학적 측면에서는 기독교와 같은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다.
7. 힐랄 음식
힐랄의 의미를 듣고 솔직히 놀랬다. 나의 무지를 반성했다. 그런 뜻이 있을줄 몰랐는데, 무함마드는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반드시 도살할 때 고통을 최소화는 도축법을 쓰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단번에 정맥을 끊는 방법으로 도축한다. 그렇게 인증되지 않는 음식은 동물의 고통을 증가시키는 불결한 음식이라는게 힐랄의 시작이었다.
8. 분쟁의 근원
마지막이다. 이들은 오늘날 종교 갈등과 전쟁의 근원은 어디있다고 생각할까? 크게 두가지 인데 첫 번째는 시오니즘의 부활이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강제로 병합하고 자신들을 배척하려 하는 유대인들에게 분쟁이 근원이 있다고 보고 있다. 두 번째 걸프전이다. 걸프전 당시 이라크의 살상무기가 있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나, 그 명분은 밝혀지지 않았고 그들에게는 중요한 성지중 하나인 바그다그를 지나치게 파괴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슬림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테러리즘이 그 이후 더 확산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까지 하겠다. 더 궁금하신 분들은 따로 공부해 보시면 좋을 것 같다. 현재 무슬림 인구는 전세계 20억명에 이르고 50여개국이 넘는 나라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싫으나 좋으나 어떻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모든 종교가 서로를 배척하기 보다는 관용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고통보다 앞설수 있는 것은 없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언제나 우리는 타자와 그들의 문화를 공부해야 한다.
이 책을 덮는데 걸작 ‘킹덤오브헤븐’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십자군 기사 발리앙과 술탄 살라딘의 대화이다. 발리앙은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은 당신들에게 무엇이냐?” 묻는다. 살라딘은 이렇게 답한다.
“Nothing or Every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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