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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이가 소망하는 세상

경계인

우리는 ‘경계인’ 이라야 한다 – 수운 최제우가 성공한 비결

긴 모색의 기간이 최제우를 융합적 창조로 이끌어 갔습니다. 그의 가슴을 지배한 것, 바로 그가 알았던 모든 지식이 하나의 용광로 속에서 하나로 결합했어요. 최제우는 전통적인 사상을 기초로 19세기 중후반의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씨름했어요. 그래서 그는 성리학만을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불교만을 들여다보지도 않았고, 도교만을 들여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이 세 가지 전통적인 지혜를 다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자기 수준에서 바라보고, 자기 수준에서 하나의 답을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찾은 해결책이 바로 하늘이었다는 점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은데요. 하늘의 뜻을 품고 있는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고귀한지를 발견한 점에, 무엇보다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늘의 뜻이 살아 움직이는 그런 존재가 우리 자신이라는 점을, 최제우가 확신했다는 점이 특별한 것이지요.

여기서 잠깐 최제우의 특별한 인생행로를 잠시 살펴보면 어떨까요. 그래야만 그가 이룩한 융합적 창조를 더욱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824년, 순조 24년 최제우는 경주에서 태어나서 1864년 3월 대구 감영에서 사형을 당했지요. 불과 41세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의 사회적 신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신분부터가 실은 경계인이었어요. 아버지 최옥은 양반이었지만 아들 최제우는 서자였어요. 최제우의 어머니로 말하면 과부가 재가한 거였어요. 쉽게 말해, ‘보쌈과부’예요. 정식 부인이 된 것이 아니라, 비공식적으로 배우자가 된 셈에요. 세상에서 말하는 첩이지요. 그 때문에 최제우는 당당한 양반 학자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그 양반사회에 설 자리가 없었어요. 

혈통으로 보면 최제우가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사망하자 최씨 집안사람들은 친척의 아이를 하나 골라서 아버지의 혈맥을 잇도록 했습니다. 최제우는 서자라는 이유로 배제당한 것입니다. 최제우에게는 참으로 뼈아픈 태생적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조선사회에서 경계인으로 살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지식이 있는 경계인이었어요. 제가 평소에 힘주어 강조한 평민지식인이었다는 말씀이지요. 최제우는 대단히 똑똑한 평민지식인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사회적인 문제, 개인적인 문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훨씬 민감하게 느꼈어요. 모든 문제를 ‘증폭’해서 바라보았어요. 이러한 관점이 그를 ‘창조적인 경계인’으로 만드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굳이 기성의 사회제도를 옹호하고 강변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거든요. 무릇 경계인이란 변화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역사상의 성공적인 지식인들은 자신을 주류가 아니라 경계에 세웠어요. 공자도 맹자도 예수도 소크라테스도 모두 그러했어요. 예수가 만약에 대사제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위대한 예수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으로부터 핍박받는 유대 땅에서, 그것도 머나먼 변경인 갈릴레이 사람이었기에, 거기서도 내세울 것이 조금도 없는 한낱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잖아요. 그랬으니, 예수가 당대의 문제를 얼마나 예민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며, 모든 문제점이 그의 눈에 비치면 얼마나 확대되었겠어요.

부처도 다르지 않았어요. 여러분들은 석가모니를 카필라 왕국의 세자쯤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달랐어요. 인간 석가모니는 가난하고 작은 공화국 카필라의 읍장쯤 되는 사람의 아들이었어요. 요즘 말로 하면 그 나라에는 왕이 없었고요, 선거로 대표를 뽑는 풍습이 있었어요. 요컨대 석가모니의 아버지는 언제까지나 촌장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석가모니가 태어나고 나서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셨잖아요. 갓난아이 석가모니에게는 얼마나 어려운 형편이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이모의 품에서 자랐던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일찌감치 생로병사의 문제에 집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어요. 경계인이라는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하지요. 

제가 지금 화제로 삼는 최제우 역시 바로 그런 경계인이었어요. 그런 이유로, 그는 자기 개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한 시대의 문제, 이 세상의 문제를 끌어안고 그처럼 정열적으로 고심했던 것입니다. 

그는 지적인 요구 수준이 높았고, 누구보다 영리했으며, 매우 민감한 정서의 소유자였어요. 그런 인간이었으므로, 최제우는 동아시아의 지적 전통을 비판적으로 검토했고, 그런 작업 속에서 에센스를 찾아낸 거였어요. 『동경대전』에 압축적으로 표현한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이제 유교도 운이 다했다. 불교의 운도 다되었다. 도교의 운도 지나갔다. 이제는 5만년 무극지도(無極之道)가 열릴 때이다.” 이렇게 말했어요. ‘무극지도’란 끝없이 훌륭한 새로운 가르침이란 뜻이지요. 새로운 가르침인 동학이 세상을 바꿀 것인데, 그 운수는 ‘오만 년 대운’이라고 했거든요.

석가모니도, 공자도, 누구도 최제우처럼 이렇게 과감하게 새로운 시대를 선포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만약에 그런 이가 있었다면 예수가 가장 비슷했죠. 광야에서 40일을 보낸 다음에 예수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이렇게 말했잖아요. 새날이 밝아오고 있으니, 준비하자는 외침이었어요. 최제우가 말한 ‘5만 년 대운’이 바로 그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다만 맥락이 다르지요. 최제우는 한국적 맥락을 강조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종교적 전통을 살펴보면 ‘회개’가 중심사상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는 ‘회개’라고 하여 절대자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유교 사회에서 자라난 관계로, 최제우는 ‘회개’라는 개념을 잘 몰랐습니다. 뜻으로 보면 결국 최제우나 최시형에게도 일종의 회개라고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만, 표현방식은 아주 거리가 멀었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유교적 맥락이 중요했던 만큼, 동학에서는 ‘경(敬)’, 공경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세 가지를 공경하라고 했지요. 하늘(경천)과 사람(경인)과 그리고 만물을 공경하라(경물)는 것이었어요. 만물이라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죠. 한 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존재를 다 하늘로 여기라고 하는 가르침이었어요. 이 모두를 지극히 귀하게 여기라고 하는 말이 최제우의 후계자인 최시형의 입에서 나왔어요. 삼경이야말로 누구라도 군자가 될 수 있는 실천의 덕목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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