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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이네 살아가는 세상

성탄절 (명동성당)

 

무박2일....

13시간 반동안의 성탄 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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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맞이한 성탄절이다.

(^______^);;;

 

한국시각 (GMT기준 09시~11시) 성탄일 05:55~08:00까지 

바티칸 성당에서 있었던

교황 베네딕토16세 집전의 성탄자정미사 강론이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습니다. 한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이사 9,5) 이사야는 멀리서 미래를 내다보며 고통과 어두움 속에서 위로처럼 이스라엘에게 말합니다. 천사는 빛의 구름 속에서 목자들에게 지금처럼 소식을 전합니다. “오늘 다윗의 고을에, 너희를 위해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는데, 그분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주님은 현존하십니다. 이 순간부터 하느님은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창조를 거쳐 또 깨달음을 따라 어떤 의미에서 멀리서 감지할 수 있는, 먼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가까이 계신 분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또한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모든 날에, 세상 끝나는 날까지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마태 28,20) 여러분을 위해 구세주가 태어나셨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했던 그 소식을 이제 하느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또 복음의 전령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다시 상기시키십니다. 이것은 우리를 결코 무심히 버려두지 않는 소식입니다. 참된 소식이라면 모든 것이 다 바뀝니다. 참되다면, 그것은 나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들처럼, 나도 역시 말해야 합니다. 어서 나는 베틀레헴으로 가서, 거기서 벌어진 말씀을 보고 싶습니다. 복음은 목자들의 역사를 뚜렷한 이유 없이 그냥 들려주지 않습니다. 목자들은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그 메시지에 어떻게 응답하는 것이 옳은 방법인지 보여줍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육화에 관한 첫 증인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목자들에 관해서는 무엇보다 그들이 깨어있는 사람들이었고, 잠깨어 있었기 때문에 메시지가 그들에게 도달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메시지가 우리에게 도달하려면, 우리도 잠에서 깨어야 합니다. 참으로 깨어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꿈을 꾸고 있는 사람과 깨어있는 사람의 차이는 꿈을 꾸는 사람이 어떤 특별한 세상에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자신의 자아와 더불어 그는 이 꿈의 세계에 갇혀있으며, 그 때문에 그 세상은 자신의 것일 뿐, 남들과 연결되지 않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자기 자아의 특별한 그 세상에서 나와 공동의 현실로, 우리 모두를 하나로 연결하는 진리의 현실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갈등, 서로 화해의 여지가 없는 현실은 우리가 저마다 자신의 관심사와 자기 의견 즉 우리들의 사적인 조그만 세상에 갇혀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이기주의는 집단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우리들을 진리와 반대되는 자신의 관심사와 욕망의 감옥에 가두며, 우리를 서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잠깨어라. 위대한 공동의 진리와 한 분 뿐이신 하느님의 친교 속으로 들어가도록 밖으로 나오너라!’고 말합니다. 잠이 깬다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감수성을 발전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마련하시는 조용한 표지들, 당신 현존의 다양한 징후들을 향하여서 말입니다. “종교적으로 음치인 사람들”이 존재한다고들 말합니다. 하느님을 인지하는 능력은 어떤 사람들은 거부하는 하나의 재능쯤으로 여겨집니다. 사실 우리의 사고와 행동의 방식, 현대 세계의 사고방식, 다양한 우리 체험의 음색들은 하느님을 향한 감수성을 축소시켜, 우리들을 하느님에 대한 음치로 만들어 버리기에 적합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영혼에는, 감추어 있건 드러나 있건 간에, 하느님을 향한 기대와, 그분을 만날 수 있는 능력이 현존합니다. 이 깨어있음을 지니기 위해, 가장 근본적인 것에 대한 깨어있음을 지니기 위해, 우리는 자신과 남들을 대신하여 기도하고자 합니다. 하느님에 대해 음치이지만, 여전히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자 합니다. 위대한 신학자 오리게네스는 “성 바오로가 보았던 것처럼 볼 수 있는 은총을 내가 만일 받는다면, 지금 (이 전례 가운데) 커다란 천사들의 대열을 관조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참조 루카 23,9) 사실 거룩한 전례 안에서 하느님의 천사들과 성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몸소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주님, 저희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어, 저희로 하여금 당신께서 곁에 계심을 다른 이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깨어있는 선견자들이 되게 하소서!

 

성탄의 복음으로 돌아갑시다. 복음은 목자들이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나서, 서로 서로 “베틀레헴으로 가자!”라고 말했으며, 지체하지 않고 그곳으로 갔다고 전합니다. “서둘러 갔다.”라고 그리스어 텍스트는 말합니다. 자신들에게 선포된 소식이 그토록 중요했기에, 그들은 곧바로 가야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에게 전해진 소식은 통상적인 일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세상을 바꾸었습니다. 구세주가 태어나셨습니다. 기다리던 다윗의 후손이 세상에 자신의 고을에 왔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호기심도 그들을 재촉했겠지만, 작은 자들,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자신들에게 전해진 그 위대한 사건 자체가 그들을 흥분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갔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만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일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으며, 그것이 그렇게 즉각적으로 우리들을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거의 모든 일에서, 그렇게 하기를 기꺼이 뒤로 미룹니다. 무엇보다도 여기서 지금, 급한 일처럼 보이는 것을 해결합니다. 우선순위가 적힌 목록에서 하느님은 거의 맨 꼴찌 자리에 있습니다. 그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일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은 최우선 순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할 만한 그 어떤 일이 있다면 오로지 그것이 하느님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서 중 가장 중요한 규칙은 “하느님의 일(곧 성무) 앞에 그 어떤 것도 두지 말라.”입니다. 준례는 수도자들에게 최우선의 일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 성인의 핵심 속에서 이 구절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하느님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현실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을 목자들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분들에게서 우리는 일상생활 속의 급한 모든 일들에 짓눌려버리지 않는 방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분들에게서 다른 모든 근심걱정을 아래 칸에 놓아두는 내적 자유를 배우고자 합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중요하든,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가기위해, 우리의 생활과 시간 속에 그분께서 들어오시도록 하기위해서 말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출발한 시간을 하느님과 이웃에 쓰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가 참으로 사는 시간이며,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시간입니다.

 

어떤 성서해설자들은 소박한 영혼을 지닌, 목자들이 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을 찾아갔으며, 세상의 구속주를 만날 수 있었던 첫 번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지위와 명성을 지닌 사람들을 대표하는 동방의 박사들은 훨씬 더 뒤에 갔습니다. 성서해설자들은 이 모든 것이 아주 분명하다고 덧붙입니다. 실제로 목자들은 가까이 살았습니다. “먼 길을 거쳐”(참조 루카 2,15) 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웃집에 가기 위해 먼 길을 거쳐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반면 박사들은 멀리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틀레헴에 도달하기 위해 멀고도 험한 길을 거쳐 가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안내자와 표지판이 필요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소박하고 겸손한 영혼들은 주님 곁에 아주 가까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자면 예수님의 이웃들이어서 아주 쉽게 그분께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우리 현대인들은 사람이 되시고, 하느님께로부터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가득 채우는 철학과 사업과 근심걱정들 속에서 살며, 그곳에서 구유로 가는 길은 멀고도 몹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께서는 거듭 우리들을 재촉하시고 손을 내미시어, 마침내 우리가 우리 생각들과 활동들의 뒤범벅에서 출구를 찾아 그분께로 이르는 길을 만나게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주님은 각자에게 적합한 표지들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부르시어, 우리도 “어서, ‘저기를 가로질러’ 베틀레헴으로 가자. 우리를 만나러 찾아오신 저 하느님께로 가자.”라고 말하게 하십니다. 우리 혼자서는 그분께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 힘을 넘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분께서 길의 가장 긴 부분을 ‘가로질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청하십니다. “와서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아라. 와서 내가 여기 있음을 보아라.” 라틴어 성경은 Transeamus usque Bethleem. 트란세아‘무스 우’스꿰 베틀레‘헴!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거기로 갑시다! 우리 자신을 가로질러 갑시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을 향한 나그네가 됩시다. 그분을 향한 길에서 내적 존재 속에서 나그네가 됩시다. 또한 아주 구체적인 길들로 걸어갑시다. 교회의 전례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이웃 섬김 속에서 걸어갑시다.

 

다시 한 번 복음을 직접 들읍시다. 목자들은 서로 서로에게 자신들을 길 떠나게 한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보자!” 그리스어 텍스트는 글자 그대로 말합니다. “거기에서 벌어진 이 말씀을 보자!” 그렇습니다. 이 밤의 새로움이 그토록 큽니다.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으니까요. 어떤 형상으로 빚어도 하느님에 대한 축소와 왜곡일 뿐이기에, 결코 형상을 빚어 만들 수 없는 그 하느님께서 몸소 자신을 버리시고, 성 바오로의 말씀처럼, 당신의 진정한 모습이신 그분 안에서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삶과 업적들,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곧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분입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들을 위한 표지이다. 한 아기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루카 2,12; 참조 6) 하느님의 표지는, 목자들과 우리들에게도 주어진 표지는 감동적인 어떤 기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표지는 그분의 겸손입니다. 하느님의 표지는 당신께서 작은 이가, 한 아기가 되신 것입니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아기가 되시며 우리의 사랑을 청하고 계십니다. 우리 사람들은 그와는 다른, 하느님의 권능과 위대함에 대한 굉장하고도 반박할 수 없는 표지를 얼마나 원하는지요. 그러나 그분의 표지는 우리들을 믿음과 사랑으로 초대하고, 동시에 희망을 줍니다. 하느님은 이런 분입니다. 그분은 권능을 지니고 계시며 선이십니다. 우리에게 당신과 닮은 자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예! 우리도 그분처럼 됩니다. 만일 이 표지가 우리들을 빚어 그렇게 만들도록 놓아둔다면, 우리 자신이 진짜로 위대한 당신의 겸손을 배운다면, 우리가 폭력을 버리고 진리와 사랑이라는 무기만 들고 나선다면, 그분처럼 됩니다. 오리게네스는, 세례자 요한의 말씀 하나를 따라, 바윗돌들이라는 상징 속에서 이교정신의 핵심을 표현합니다. 이교정신은 감수성의 결여입니다. 곧 사랑하는 능력, 하느님의 사랑을 감지하는 능력이 없는 돌 같은 마음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이교인들에게 “감정과 이성이 모자라는, 목석같은 사람들이다.”(루카 22,9 참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살과 같은 마음을 주시고자 합니다. 거룩한 밤의 전례 속에서 하느님은 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가 참으로 사람이 되게 만드십니다. 다시 오리게네스의 말을 들어봅시다. “사실, 이미 살을 가지고 오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영혼에 도달하실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매일 매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마침내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갈라 2,20)고 말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루카 22,3)

 

그렇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 거룩한 밤에 우리는 기도하고자 합니다. 베틀레헴에 태어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희에게 오소서! 제 안에, 제 영혼에 들어오시어, 저를 변모시키소서. 저를 새롭게 하소서. 저와 우리 모두를 목석같은 사람들에서, 당신의 사랑이 현존하는 살아있는 사람들로 만드시어 이 세상이 변모되게 하소서.

아멘


 

 

 

 

 

 

 

성탄 자정미사 마지막 에필로그에 내가 화면에 나온걸 본 사람 있을까?

ㅋㅋㅋㅋ

어쨌든 모든이에게 즐거운 성탄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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