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5개의 기사는 '우끼시마마루(浮島丸) 폭침사건’ 에 관한 김정동(목원대 교수), 김수종, 조선신보(리송학 기자 外)의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 1.우끼시마마루의 진실은 고혼을 다시 불러내 몇 년 전 북한은 ‘우끼시마마루(浮島丸) 폭침사건’을 영화로 제작했다. 제목은 <살아있는 영혼들>이었다. 북한 조선중앙방송은 이 영화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현해탄에서 생죽음을 당하게 된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이 일제 야수들을 절규하는 울부짖음이 끝없이 메아리 치는 것”으로 끝났다며 “역사적 사실을 진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영화는 일제의 범죄적 만행으로 숨진 조선 사람들의 영혼들이 오늘도 일제야말로 우리 인민의 철천지 원수이며 수난에 찬 과거를 절대 잊지말고 일제의 엄중한 죄행을 반드시 결산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 모두에게 다시금 새겨주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000.12.12, 연합) 사실 우끼시마마루 폭침사건은 몇년 전 부산의 극단 ‘새벽’이 연극화했다. 1992년 처음 서울 혜화동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상연될 때의 제목은 <폭침- 우끼시마마루는 부산항으로 못 간다!>였다. 그 후 3년만인 1995년 8월 3일 부산의 소극장 실천무대에서 다시 올렸을 때는 이성민(李性旻) 작·연출의 <피의자- 우끼시마 호 폭침에 관한 단상>이란 이름으로였다. 일본에서도 이 사건은 영화화된 바 있다. 우끼시마마루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아시안 블루>가 1995년 7월 28일 도쿄에서 개봉됐다. 마이니치 신문은 영화는 ‘우끼시마마루 사건 제작지원 연락회의’가 결성된 지 3년만에 빛을 보게 되는 것이라 했는데 이에는 재일동포들의 도움도 컸다고 한다. 신문평은 ‘현대의 청춘 군상과 패전 직후의 사건을 중첩시켜 묘사한 문예작품’이라 했는데, 같은 해 8월 14일 저녁 한겨레신문 문화센터에서도 상영된 바 있었다. 우끼시마마루 폭침사건은 어떻게 폭로되어 왔든지 그 몇 사람의 공로를 추적해 보자. 이 사건은 1945년 이후 남북한, 그리고 일본에서도 관심 사항이 되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재일동포 박경식(朴慶植 1922-98)씨가 1965년 <조선인 강제연행기록>에서 다루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NHK 는 1977년 8월 13일 이 사건을 <폭침>이란 제하에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송, 일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재일동포 김찬정(金贊汀)이 1984년에 고단샤(講談社)에서 <우끼시마마루, 부산항으로 향하지 않다>를 출간하면서 전면에 부각됐다. 1992년 시모기타 지역문제 연구소 사이토 사쿠지(齊藤作治) 소장이 <아이고의 바다>를 펴냈고, 이것을 1996년 <우끼시마마루 폭침사건 진상>이란 제목으로 가람기획에서 출판,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은 ‘우끼시마마루 폭침 진상규명위원회’전재진(田在鎭) 회장의 편역으로 나온 것이다. 동경에서 발행되는 교민잡지 월간<아리랑>에서도 1996년 8월 곽미정 편집장의 취재로 이 사건을 다룬바 있으니 이 사건은 전후 55년 간의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되어 있는 셈이다. 우끼시마마루 귀환선으로 출항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북쪽 가장자리 땅 아오모리현[靑森縣]의 시모기타(下北) 반도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시모기타 반도는 도끼같이 생긴 땅으로 반도 초입에 있는 오미나토 항[大津港]에는 오미나토 경비사령부가 포진하고 있어 이쪽 해안 방어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오미나토 항은 현재의 무쓰시에 속해 있는 항구로 아오모리 시와는 오미나토 선[大津線]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미나토 해군 경비사령부는 패전 3일 만인 8월 18일 우끼시마마루 함장인 도리우미 긴고(鳥海金吾) 중좌에게 조선으로 돌아가는 귀환자를 태우고 부산으로 가라고 출항 명령을 내렸다. 매우 발빠른 조치였다. 우끼시마마루는 4,730t짜리 대형 배로 1937년 오사카 상선 소속의 화물 및 여객선으로 건조된 것이었다. 태평양 항로와 오키나와 항로를 운항하다가 전쟁 중이던 1941년 9월 3일에 징발되어 전함으로 개조되어 해군의 특무함으로 쓰였고 해군 특별 수송선이 되었다. 주로 쓰가루 해협[津經海峽]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유언비어를 날조하고 오미나토 부두 앞으로 이동시켜 ‘배에 타지 않는 자에게는 배급을 주지 않는다’며 강제 승선시켰다. 귀환자들은 홋카이도 지방에서 혹사 당하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3,725명이 이 배에 강제로 태워졌는데 숫자는 매우 불확실하다. 약 4천명에서 7천 5백명이라는 설까지 있다. 승선 명부도 작성되지 않았고 마구잡이로 태웠기 때문인데 사람은 그저 짐짝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태운 이유는 딴 데 있었다. 일본인 승객은 단 한명도 없었으며 일본 해군 255명만이 호송 담당으로 승선했다. 해군들 역시 가고 싶지 않은 항해였다. 조선으로 가봤자 좋은 일은 전혀 없을 것 같아서였다. 부산에서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명령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찝찝했다. 그들은 호시탐탐 뛰어 내릴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 배의 운명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차피 수장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귀환자들은 다가오는 운명을 모른 채 귀국의 기쁨에 지난 모든 것을 털고 그 배에 올라 탔던 것이다. 5일이 지난 후인 22일 밤 10시 우끼시마마루는 오미나토 항을 출항했다. 우끼시마마루는 "뜬섬 같은 배"란 뜻이 된다. 배는 쓰가루 해협을 지나 동해 쪽으로 나와 니가타 앞바다를 거쳐 쓰루가[敦賀]를 지났다. 이틀간의 항해가 계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배 안은 그야말로 지옥도(地獄圖)와 다름없었다. 콩나무 칸같은 배 속에서 그들은 먹고 자는 것과 배설을 해결해야 했다. 승객들은 배가 부산으로 가는지 진해로 가는지 혹은 원산으로 가는지 그 방향도 모르고 있었다. 배는 이제 더 이상 가지 않을 것인데 그것도 모르면서 말이다. 붉은벽돌의 도시 배는 드디어 운명의 종착지가 될 교토부[京都府]의 마이쓰루 만[舞鶴灣]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일본은 보통 남태평양 쪽을 표일본(表日本), 우리나라 동해 쪽은 이일본(裏日本)이라 부른다. 교토 시는 혼슈(本州)의 남쪽 도시이므로 표일본에 해당하고 마이쓰루 시는 이일본에 해당한다. 교토 부는 일본의 허리에 해당하는 곳인 것이다. 마이쓰루시[舞鶴市]는 멀리 북쪽 나라에서 이곳까지 날라온 학이 날개를 펴고 쉬는 모습이 마치 학이 춤을 추는 것 같다하여 이름 붙여진 곳으로 여름에는 비가 많고 겨울에는 눈이 많은 지역이다. 마이쓰루는 천혜의 항구로 청일전쟁이 일어날 즈음에는 이미 일본 해군의 거점이 되어 있었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그 전리품으로 마이쓰루에 군항을 건설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러일전쟁 때는 도고(東鄕平八郞, 1847-1934) 중장이 이곳에 진을 치며 승리를 이끈 곳이기도 했다. 마이쓰루는 요코스카[橫須賀], 구레[吳], 시세보(佐世保)와 함께 일본 4대 군항으로 해군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전쟁 전 일본에서 해군 장교를 양성하는 곳은 세 군데 있었는데 그 곳은 히로시마 현의 에타시마(江田島) 해군병학교, 도쿄의 쓰키지[筑地] 해군경리학교,그리고 마이쓰루의 해군기관[機關] 학교였다. 마이쓰루 역 뒤편 언덕에 있던 해군기관학교 학생들은 제복에 단검을 차고 시내를 활보, 여성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곤 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해군 군사기지로 벽돌창고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중 70여 동이 지금도 남아있는데 어뢰, 총포 등을 넣어두던 창고들이었다. 이곳 창고에서 나온 어뢰들이 우끼시마마루 폭침에 쓰여졌을지도 모른다. 그 군용창고 건물들이 지금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마이쓰루시의 개성을 상징하는 건물로 보호,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시민 운동가들에 의해 붉은 벽돌 건조물의 조사 활동이 이뤄지고 붉은 벽돌 심포지엄이란 것도 열렸으며 매년 여름이면 이 창고군에서 야외 재즈 페스티벌이 벌어지기도 한다. 1993년 11월에는 세계최초의 ‘붉은 벽돌 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섰다. 붉은 벽돌 창고 중 하나가 지금 ‘붉은 벽돌 박물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지방자치체가 도시 관광의 초점을 붉은 벽돌에 맞춘 것이다. ‘붉은 벽돌 거리’도 만들어지고 붉은 벽돌을 주제로 하는 많은 관광상품도 나왔다.(前 久夫, <京都의 붉은 벽돌>, 京都新聞社, 1997) 비록 우리에게는 비극의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만 보존주의자에게는 참으로 부러운 곳이기도 했다. 자폭? 피폭? 8월 24일 오후 5시. 배는 ‘음료수 보급이라는 명목으로 기항하기 위해’ 마이쓰루 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항해의 종말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오후 5시 20분경 시모사바가[下佐波賀] 앞에 배가 이를 무렵 배는 폭발음을 일으키며 침몰했다. 만으로 들어 온 지 20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시모사바가는 마이쓰루 만내에 어촌이었는데 그 마을에서 해상으로 3백m 떨어진 지점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우끼시마마루 사건’이다. 이름에서 배는 떠있는 의미를 주고 있지만 그 배는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조선인 524명과 일본군 25인을 포함한 549명이 일시에 수장되었는데 이 숫자는 일본군이 발표한 것이라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수장된 조선인이 6천 5백명이라는 추정치도 있어 타이타닉 호의 참변보다 더한 대형 해상사고였다. 타이타닉 호는 1912년 침몰했는데 승선인 2,228명 중 1,523명이 사망한 사건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침몰이 ‘자폭침몰’인가 ‘피폭침몰’이었는가다. 일본은 이 사건을 ‘미국 기뢰에 의한 단순 해상사고’로 발표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그 사건의 사후처리이다. 일본 정부는 쉬쉬하고 입막음했다. 우리나라의 그 뒤처리 방법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도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이 도시는 군사 도시였기에 조선인에게는 더 괴로운 도시이기도 했다. 군경의 경계가 무척 삼엄했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스파이로 몰리는 지경이어서 숨어서 지내는 편이 오히려 좋았다. 폭침사건도 그런 경계 하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비밀이 오래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죽은 사람 명단, 그 현장 사진 한 장 남지 않았던 것이 다 그런 연유였다. 엉터리 신문들은 그 날 일어난 ‘하치고 선(八高線) 열차 충돌사건’을 대문짝 만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또 그즈음 공교롭게도 마이쓰루 항구 부근 타이라 해병단 숙소에서 또 다시 원인모를 증기폭발 사고로 5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우끼시마마루에서 구조된 일본군들이 수용되었던 숙소에서였다. 입막음 작전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은폐 중 재일 근대사 연구가 최석의(崔碩義)씨는 ‘8·15 해방 전후 마이쓰루의 추억’(재일조선인 운동사연구회, 재일조선인사연구, 1993.9)이란 글에서 마이쓰루에서의 개인적 경험을 적고 있다. 그는 1943년부터 46년까지 이곳에 살았는데 그가 이곳에 살게된 경위는 군수경기로 비교적 살기가 좋았고 미군 공격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기 때문이었다. 마이쓰루 시에도 강제연행된 조선인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다. 역시 조선부락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이들은 대개 군사도시를 만들 때 동원된 사람들인데 대개 1939년에서 45년까지 7년동안 끌려왔다. 최석의씨는 이곳에서 우끼시마마루 폭침사건 뒷마무리를 하기도 했고 그 후 일본으로 귀환하는 동포들, 조선 땅에서 돌아오는 일본인들의 귀환 모습을 목격한 사실을 이 글에서 증언하고 있다. 1천명 중 살아난 사람들은 그 후 다시 조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대로 일본 땅에 남은 사람도 많았다. 현재 66세가 된 사람도 있는데 배를 탈 당시 10세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었다. 배는 침몰하고 나서 1954년 10월까지 그 바다에 수장된 채로 있었다. 수장된 조선인의 시신도 그대로였으며 후생성 원호국이 인양했을 때 283구의 유골만이 수습되었다. 그리고 인양된 배는 이노(飯野)중공업주식회사에 고철로 팔려나가 분해되어 버렸다. 그렇게 서두를 일이 아니었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한국전쟁과 그 후 전재복구로 고철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기록을 잘 남기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하는 일본인들이 왜 이 배를 마이쓰루 항구에 보존하지 않고 내버렸을까. 그 이유는 알만한 것이다. 이 수장자들을 위로하는 추도회는 두 곳에서 열리고 있다. 그 수습된 유골들은 도쿄 메쿠로 구[目黑區]의 절 유텐지[祐天寺]에 안치되었다. 때문에 그 추도회가 매년 8월 22일 유텐지에서 열리고 있는 것이다. 추도회에는 패전 뒤 포로 학대 등의 혐의로 B,C급 전범으로 억울하게 구속되었던 재일동포들의 모임인 동진회의 회원들도 참석해 일본의 전후 보상문제를 추궁했다. 일본 정부는 이들의 유골들을 유족들에게 반환할 방침이라고 1995년 6월 9일 밝혔다. 유족과 생존자들은 이미 약 30억엔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있다. 교토 지방법원은 인도적 관점에서 조기반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다. 인도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고 조기반환은 무슨 말인가. 2002년 교토 재판소의 판결에서는 승객에 대한 안전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과오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지만, 2003년 5월의 오오사카 재판소의 판결은 일본정부는 책임이 없다였다. 이 판결로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또 하나 ‘우끼시마마루 순난자(殉難者)를 추도하는 모임’은 마이쓰루 ‘순난의 비’ 앞에서 치러지고 있다. 이름이 ‘순난’으로 교묘하게 포장되고 있다. 추도 집회는 지역주민과 재일동포 등에 의해 치러지고 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 1996년 8월 24일 후생성장관 간 나오토(菅直人-현 민주당 당수)는 우끼시마마루 사건의 조선인 희생자 등을 애도하는 전보를 이 추도집회에 보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조난으로 숨진 분들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전한다.…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존귀함을 다음 세대에 계속 전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전후 범죄사건 이후 장관급이 보인 첫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 애도전보는 폭파 침몰을 지시한 자에 대한 책임자 문제, 이에 대한 사죄문제, 그리고 보상 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시간은 그렇게 가고 있다. 문제를 제시하는 유족들의 소리도 메아리로 사라져 버릴 뿐이다. 2.우끼시마마루 진상에 관한 새자료 발견 지난 9월 29일 일본 동경에서 발행되는 총련계 일간신문인 <조선신보>의 발표에 따르면, 해방직후인 1945년 8월 24일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따라 징용으로 끌려 왔던 조선인을 귀환시키려고 한 “우끼시마마루(浮島丸)”가 마이즈루(舞鶴) 앞바다에서 폭발, 침몰한 사건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최근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자료는 일본정부가 1950년 2월 당시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GHQ(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에 제출한 보고서의 일부라고 밝혔다. 당시 일본정부는 500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이 사건과 관련 말로는 인도적으로 대응한다고 하면서도 진상규명은커녕 피해자의 유골수집조차 회피했을뿐만 아니라 GHQ에 “조선측이 배상요구를 제기해 와도 이를 용인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자료에 의해 밝혀졌다고 한다. 조선인강제연행조사단이 발굴한 이 자료는 2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 및 해외동포 연구인들에 의한 “우끼시마마루(浮島丸)"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에서 발표되었다고 <조선신보>는 밝혔다. 우끼시마마루(浮島丸)사건이란? 일본의 동북부에 위치한 아오모리(靑林)현의 일본 해군기지에 끌려와 강제노역을 하던 조선인과 그들의 가족 3735명을 해방 직후인 45년 8월 22일 부산으로 귀환시키기 위해 군함에 싣고서 출발하면서부터 시작된다. 부산을 향하여 출발한 우끼시마마루호는 갑자기 진로를 변경하여 교토(京都)의 마이즈루항(舞鶴港)에 입항하여 정박한 후 24일 저녁 다시 출발한다. 하지만 출발 직후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 사고와 함께 배가 침몰, 524명(일본 정부의 공식발표)이 수장되었다. 폭파사고와 배의 침몰은 당시 일본군에 의한 계획적인 범행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아직도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3.우끼시마마루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 공동성명 력사적인 6.15공동선언의 기치밑에 자주통일을 위한 민족공조의 기운이 날로 높아 가고 있는 가운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북과 남,해외의 단체 대표들과 연구자들, 피해자 및 유가족들은 평양에서 《우끼시마마루》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지금으로부터 58년전인 1945년 8월 24일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일본에 강제로 끌려 가 가혹한 노예로동을 강요 당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 광복의 기쁨을 안고 귀국의 배길에 올랐던 수천명의 무고한 우리 인민이 한꺼번에 이역의 바다에 수장되여 억울하게 생죽음을 당한 몸서리치는 《우끼시마마루》사건이 발생되였다. 일본당국이 이 대학살만행의 진상을 가리워 보려고 온갖 비렬한 수를 다 써도 력사의 진실은 결코 감출수 없다. 일제에게 무참히 유린 당하였던 민족의 존엄과 명예를 되찾기 위한 줄기찬 투쟁속에서 그리고 우리 인민에 대한 일제의 과거죄행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한 오랜 기간의 꾸준한 노력에 의하여 《우끼시마마루》사건의 진면모는 날이 갈수록 더더욱 적라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끼시마마루》사건은 철두철미 우리 민족의 말살을 노린 일제의 악랄하고 뿌리 깊은 민족배타주의와 범죄적인 침략정책의 산물이며 국제법상 대량학살죄에 해당되는 중대한 인권유린범죄이다. 지금까지 조사확증된 모든 자료들은 일제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직후 저들의 침략전쟁수행을 위하여 일본으로 강제련행해 갔던 수천명의 무고한 우리 인민들을 《우끼시마마루》에 태운 다음 고의적으로 배를 폭파,침몰시키는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하였다는것을 만천하에 고발하고 있다. 력사는 일제와 같이 다른 나라 인민들을 수백만명이나 랍치,련행하여 노예처럼 마구 부려 먹고도 성차지 않아 저들의 범죄적죄행을 은페하고 패전의 화풀이를 위해 단꺼번에 수천명이나 바다에 처넣어 죽인 치떨리는 인간백정들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당국은 《우끼시마마루》사건이 있은 때로부터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까지도 이 대학살참상의 전모를 조사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그 책임을 한사코 회피하려 하고 있다. 우리들은 수천명의 무고한 우리 인민들을 무참히 학살하고도 추호의 량심상 가책을 느끼지 않고 사실외곡과 책임회피에 매여 달리고 있는 일본당국의 파렴치하고 비렬한 행위에 치솟는 민족적분노와 혐오감을 금할수 없다. 우리들은 일제가 저지른 《우끼시마마루》사건을 우리 민족에 대한 참을수 없는 모독행위로,가장 잔인하고 야만적인 살인행위로 통렬히 단죄규탄하면서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일본정부의 사죄보상을 받아 내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확고한 의지를 담아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첫째, 우리들은 서로 긴밀히 련대하고 단합하여 하나된 힘으로 《우끼시마마루》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그를 온 세상에 낱낱이 공개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것이다. 수천명의 무고한 우리 인민들을 한꺼번에 참혹하게 학살한 일본의 천인공노할 죄행은 절대로 묻어 둘수도,용납할수도 없다. 우리들은 우리 민족특유의 완강한 의지와 인내력,슬기와 지혜를 발휘하여 그리고 온갖 가능성을 다 동원하여 사건의 진상을 반드시 해명하고야 말것이다. 둘째, 우리들은 일본정부가 《우끼시마마루》사건을 포함하여 과거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감행한 모든 반인륜범죄에 대해 우리 민족앞에 사죄하고 보상할 때까지 결단코 투쟁을 멈추지 않을것이다. 일제가 감행한 모든 과거죄행의 진상을 규명하고 철저히 청산하는것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우리 민족의 존엄과 명예를 지키고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기 위한 중대한 민족사적과제이다. 우리들은 민족과 력사앞에 지닌 숭고한 사명감을 다시금 깊이 자각하고 일본이 감행한 중대인권유린범죄사건들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정의의 투쟁을 힘 있게 벌림으로써 우리 민족,우리 겨레의 기대에 반드시 보답할것이다. 북측 조선 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일제의 조선강점피해조사위원회 남측 《우끼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등에 관한 진상규명특별법 제정추진위원회 해외측 조선인강제련행진상조사단 2003년 9월 29일 평양 4.우끼시마마루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 기조보고 계획적이며 의도적인 폭침사건 《우끼시마마루》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에서는 조선 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련행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 홍선옥위원장이 기조보고를 하였다. 요지를 게재한다. 사건의 경위 이번 토론회는 반세기이상이나 력사의 흑막속에 묻혀 있는《우끼시마마루》사건의 진상을 똑바로 밝혀 내고 일본으로부터 과거죄행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받아 내기 위한 전민족적인 활동을 적극 추동하는 의의 있는 계기로 된다. 지난 20세기초에 방대한 무력으로 우리 나라를 불법강점한 일제침략자들은 장장 40여년동안 전대미문의 포악무도한 군사적통치를 실시하였다. 조선민족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애버리기 위해 피눈이 되여 날뛰던 일제는 중일전쟁발발후부터 패망할 때까지 840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사람들을 랍치, 강제련행하였으며 100여만명을 학살하고 20만의 조선녀성들을 《황군》의 성노리개로 만들었다. 《우끼시마마루》에 몸을 실었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수천명의 조선사람들도 바로 일제의 이러한 야만적인 조선민족말살정책의 참혹한 희생자들이였다. 《우끼시마마루》는 원래 4,730톤급 민간려객화물선이였는데 1941년 9월에 일본해군에 징발되여 포함으로 개조된후 일본해군 제22전대 1감시대 감시선으로 배치되였다가 1945년 4월부터는 오미나또해군경비부에 특설운송함으로 배속되여 수송임무를 수행하였으며 패전직전에는 아오모리항에서 하꼬다떼항으로 려객을 수송하는 일을 하였다. 《우끼시마마루》는 1945년 8월 15일 쯔가루해협을 항행하던 중 일본의 항복소식을 듣고 8월 18일에 오미나또항으로 귀항하였는데 거기에서 조선사람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게 되였다. 8월 22일 밤 10시 강제로동에 시달리던 조선사람들을 태우고 부산으로 간다고 출발한 《우끼시마마루》는 일본의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 교또부 마이즈루항입구 해안선으로부터 약 300메터 떨어진 수심 16메터정도의 바다에서 갑자기 3~4번의 요란한 폭발과 함께 두동강나면서 침몰되고 말았다. 이로 하여 《우끼시마마루》에 타고 있던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이 한순간에 바다속에 수장되고 말았으며 승선자의 극히 일부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게 되였다. 5가지 근거 이 사건은 《우끼시마마루》에 《부산행》명령이 내려 진 시각부터 마지막처리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이 무수한 불일치와 의혹으로 가득차 있으며 피해생존자들의 증언과 지금까지 조사발굴된 자료들은 사건이 결코 기뢰에 의한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일본군부당국의 계획적이며 의도적인 조작에 의해 감행된 폭침사건이라는것을 립증하여 주고 있다. 그 근거는 첫째로, 《우끼시마마루》의 오미나또출항이 일본정부의 허가와 지시밑에 진행되였다는것이다. 일본방위청 전쟁사자료실에서는 1945년 8월 19일 해군성 운수본부에서 오미나또해군경비부 참모장앞으로 보낸 전보가 발견되였다. 이 전보는 오미나또해군경비부가 보낸 제181439호 전보에 대한 답전으로서 《우끼시마마루》의 운항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밝혀 져 있다. 이것을 통해 《우끼시마마루》의 출항이 오미나또해군경비부의 단독결심이 아니라 일본군부당국의 직접적인 지시에 의해 이루어 진것이라는것을 확인할수 있다. 둘째로, 《우끼시마마루》의 조선인승선과 배의 출항이 일본군부당국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것이다. 당시 오미나또해군경비부는 시모기따반도지역에 있는 조선사람들에게 《우끼시마마루》가 부산으로 가게 되는데 조선에 가는것은 이 배편밖에 없다고 하면서 모두 《우끼시마마루》를 타도록 회유, 강박하였다. 또한 《우끼시마마루》의 승조원들이 전쟁이 끝났는데 무엇때문에 조선에 가야 하는가고 출항을 거부하자 오미나또해군경비부의 참모는 승조원들을 모여 놓고 명령을 집행하지 않으면 군법회의에 걸어 처형하겠다고 위협하여 강제로 출항하도록 하였다. 셋째로, 《우끼시마마루》는 처음부터 부산항이 아니라 마이즈루항을 향해서 떠났다는것이다. 《우끼시마마루》의 이전 승조원의 증언에 의하면 이 배는 출항시에 얼마 되지도 않는 연료를 가지고 떠났는데 이것은 《우끼시마마루》에 애당초 부산항까지 항행할 계획이 없었다는것을 말하여 준다. 방위청 전쟁사자료실에서는 련합군의 요구에 따라 8월 24일 18시이후부터 100톤이상급 선박들의 일본령해에서의 항행을 금지하게 된것과 관련하여 해군성 운수본부가 8월 22일 오후 7시와 7시 20분 2차례에 걸쳐 《우끼시마마루》에 《그 시간까지 목적항에 도착하도록 노력하며 도착할수 없는 경우에는 제일 가까운 항으로 입항하라》고 지시한 전보문이 발견되였다. 《우끼시마마루》는 8월 22일 밤 10시에 오미나또항을 출발하였는데 부산쪽으로 직행한다 해도 8월 24일에는 부산가까이에 있거나 공해상에 있게 되며 그때에는 이미 일본령해를 벗어 나게 되므로 련합군의 요구에도 구속되지 않게 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해군성에서 목적지 또는 가까운 항으로 입항하라고 한것은 그 목적지가 부산이 아닌 다른 곳을 가리키고 있으며 해군성은 이미 《우끼시마마루》의 움직임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것을 말해 준다. 이밖에도 《우끼시마마루》가 마이즈루나 일본의 어느 다른 항에 들어 간다는 소문이 배가 떠나기전부터 이미 승객들과 일본사람들속에 퍼져 있었다는 사실이 증언을 통해 확인되였다. 넷째로, 마이즈루항으로 들어 가는 항로는 기뢰해제가 끝난 안전항로였다는것이다. 《우끼시마마루》는 입항하기 전에 마이즈루경비대 신호소로부터 소해완료라는 신호를 받은 후에야 항으로 들어 갔다. 또한 《우끼시마마루》가 마이즈루항으로 들어 가기에 앞서 몇분을 사이에 두고 2척의 경비함이 같은 항로로 무사히 들어 갔다. 더우기 그 날은 8월 24일이였으므로 련합군의 선박항행금지요구에 따라 많은 배들이 마이즈루항으로 무사히 들어 갔다. 이렇게 많은 선박들이 지나가도 폭발하지 않던 기뢰가 그것도 제일 마지막에 들어 온 《우끼시마마루》에 한해서만 반응을 했다는것은 상식적으로도 있을수 없는 일이다. 다섯째로,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폭발과 함께 반드시 동반되여야 할 현상들이 일어 나지 않았거나 비정상적이라는것이다. 그러한 현상으로서 먼저 기뢰폭발이라면 반드시 수십메터의 거대한 물기둥이 일어 나야 한다는것이다. 특히 얕은 바다에서는 깊은 바다에서보다 더 굵은 물기둥이 솟는 법이다. 그러나 《우끼시마마루》에 탔던 피해생존자들은 일치하게 이 배의 폭발때에는 그러한 물기둥이 전혀 없었다고 일치하게 증언하고 있다. 또한 피해자들은 《우끼시마마루》폭발시 3~4번의 련속적인 폭발소리를 들었다고 하고 있다. 기뢰는 한번밖에 폭발하지 않는것이 상례인데 련속 폭발하였다는것은 이것이 기뢰가 아니라는것을 말해 준다. 그리고 만일 기뢰에 의해 폭발하였다면 철판들은 밖으로가 아니라 안쪽으로 휘여 들어야 하는것이다. 그러나 1954년에 일본의 민간기업이 저들의 리윤추구를 위해 끌어 올린 《우끼시마마루》의 밑창철판들의 방향은 정확히 밖으로 휘여 져 있었는데 이것은 폭발이 다름아닌 배안에서 일어 났다는것을 립증하여 주고 있다. 이밖에도 당시 조선사람들과 오미나또지구 일본시민들속에서는 《우끼시마마루》의 출항을 전후하여 의도적인 폭침과 관련한 소문이 많이 돌았다. 제반사실들은 《우끼시마마루》가 사전에 면밀히 세워 진 폭파계획에 따라 배안에 장치한 폭발물에 의해 폭침되였다는것을 보여 주고 있다. 사건 매장하려는 일본 그러면 일본반동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뒤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엇때문에 품들여 《우끼시마마루》의 《부산행》이라는 연극을 꾸미고 이런 폭파사건을 조작하였겠는가 하는것이다. 일제는 무엇보다도 《대동아공영권》의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된 분풀이와 앙갚음을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을 살해하는것으로 해보려 하였던것이다. 일제는 침략전쟁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하였지만 결코 저들의 범죄행위를 속죄하거나 반성한것이 아니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저들이 무지렁이처럼 짓밟고 씨종자마저 없애려 했던 조선사람들이 광복을 맞이하게 된것을 분통하게 여기였으며 그들의 기쁨과 희망을 꺾어 버리고 마지막순간까지 고통을 주어 저들의 울분을 풀어 보려 한것이다. 이러한 일제살인마들의 행패는 패전직후 일본군부당국과 개별적군인들,우익깡패들에 의해 일본각지에서 련이어 일어 났다. 자료에 의하면 1946년 한해동안에만도 일제야수들은 2만 6,000여명의 조선사람들을 체포하여 규슈일대의 10여개 《수용소》들에 감금하고 온갖 민족적멸시와 학대를 가하고 살해하였다. 일제는 또한 수백만의 조선사람들을 강제로 련행해다가 무참히 살륙하고 온갖 비인간적만행을 다한 저들의 범죄행위가 세상에 알려 지는것이 두려 워 산 증인들인 조선인피해자들을 없애치우는 방법으로 저들의 범행을 숨겨 보려 하였던것이다. 일본정부는 전후 반세기가 지나도록 《우끼시마마루》사건에 대한 저들의 책임을 완강히 부정하면서 일관하게 기뢰에 의한 폭침이라고 주장하였으며 사건에 대한 초보적인 조사도 진행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조사는 커녕 어떻게 해서든지 사건이 여론화되는것을 막고 흑막속에 덮어 버리기 위해 책동하였다. 그것은 우선 일본당국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 사건경위나 사망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료해도 없이 서둘러 사건을 처리해 버린데서 나타나고 있다. 《우끼시마마루》의 함장은 사고가 일어난 다음날 똑똑한 조사도 하지 않고 해군성에 기뢰에 의한 침몰로 보고하였다. 일본정부는 이렇게 확인도 되지 않은 자료를 가지고 지금까지 기뢰에 의한 폭침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을 립증할만한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전후 2차례에 걸쳐 민간기업들에 의해 《우끼시마마루》인양작업이 진행되였으나 일본정부는 그때마다 사고원인을 조사할데 대한 재일조선인들의 요구를 무시해 버렸다. 또한 일본당국은 《우끼시마마루》사건의 희생자확인사업을 매우 형식적으로 진행하였으며 피해규모도 극력 축소하여 발표하였다. 일본당국은 승선자수를 당시에 작성되였다고 하는 승선자명부에 따라 3,735명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피해생존자들은 당시의 승선자수를 7,000명~8,000명 혹은 1만 3,000명정도라고 증언하고 있다. 1950년에 민간기업이 《우끼시마마루》를 인양하려 했을 때 《우끼시마마루》에 남아 있는 유골문제와 관련하여 재일조선인들이 반발하자 마이즈루지방복원잔무처리부는 재일조선인들에게 승선자명단을 제시할것을 약속하고도 그를 리행하지 않았다. 더우기 1954년에 2차 《우끼시마마루》인양작업을 진행하면서 그 사전작업으로 선내에 남아 있던 유골들을 발굴정리하였는데 이때 자기형태가 다 있는 온전한 유골은 한구도 없었으므로 유골수를 확인하는 사업이 매우 부정확하게 진행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우끼시마마루》인양작업이 끝난후 이로써 2차례에 걸쳐 발굴된 유골과 당시 다히라해병단 부지안에 매몰하였다가 후에 정리한 유골들의 수가 모두 합쳐 524구라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더욱 의심스러운것은 일본당국이 이 524명이라는 수자마저 절반으로 축소하여 여론화하였다는것이다. 일본당국은 《우끼시마마루》사건에 대해 미군정당국에 보고하면서 사망자를 260명으로 대폭축소하였으며 이 수자를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하였다. 이것은 일본당국이 《우끼시마마루》사건에 깊숙이 관여하였으며 사건의 책임이 전적으로 일본당국에 있다는것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증거라고 할수 있다. 북, 남, 해외가 단결하여 일본은 전쟁법규와 국제인도법원칙에 따라 구일본국의 과거죄행에 대한 법적 및 도의적책임을 인정하고 철저히 사죄하고 보상할 국제법적의무를 지니고 있다. 사건이 있은 때로부터 56년이나 지난 2001년 8월 일본의 교또지방재판소에서는 1992년부터 있은 《우끼시마마루》사건의 생존자들과 유가족들의 제소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그때 교또지방재판소는 매우 간접적인 근거이기는 하지만 당시 나라들사이에 《려객운송계약과 류사한 법률관계가 성립되여 있었다》는데로부터 안전배려의무의 위반을 전제로 하여 이 사건에 대한 일본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 판결도 역시 《기뢰에 의한 폭침》이라는 관점에 립각한것이였으며 《우끼시마마루》사건의 진상규명과 공식사죄에 대한 피해자들의 요구를 외면한것이였다. 더우기 오사까고등법원은 교또지방재판소가 내린 판결마저 무시하고 피해자들의 제소를 기각시켰다. 국가와 사회에 질서를 세우고 인간의 생명과 권리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사법부가 수천명의 생명을 앗아 간 범죄행위에 대해 이토록 무책임하고 비인도적인 태도를 취한것은 실로 《법치국가》를 광고하는 일본의 수치가 아닐수 없다. 일본정부의 태도는 제2차 세계대전시기 파쑈도이췰란드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적극적인 보상조치를 취하고 실천해 나가고 있는 도이췰란드정부와는 너무도 판이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도이췰란드정부는 전후에 스스로 10만명의 나치스전범자들을 조사하여 6,000명에게 유죄를 선고하였으며 지금까지 무려 100만명이상의 나치스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전후 단 한명의 전범자도 스스로 처벌하지 않았으며 과거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회피하면서도 지난날 침략전쟁에 나섰던 구일본군인들과 유가족들에게는 거액의 은급을 지불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처사는 인간의 초보적인 도덕과 량심,국가로서의 체면도 도리도 모르는 파렴치한 행위이다. 지금까지 여러 관련단체들과 진보적인사들의 진지한 노력과 피해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해 《우끼시마마루》사건의 여러 측면들이 밝혀 지게 되였으며 사건의 전모를 밝힐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끼시마마루》사건의 해결을 끝까지 추구할것이며 이를 위해 일본정부에 ①사건의 전모를 철저히 조사규명하고 사실을 그대로 공개할것 ②사건에 대한 국가적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국가의 명의로 사죄, 보상할것 ③사건에 관여한 모든 범행자들을 찾아 내여 책임소재에 따라 처벌할것 ④사건시에 희생된 피해자들의 유해를 모두 찾아 신분을 확인하고 안전하게 송환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책을 세울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북과 남, 해외의 단체, 인사들과 피해자, 유가족들이 힘과 지혜를 하나로 합쳐 련대투쟁을 힘 있게 전개해 나가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는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규명하고 일본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이 분산적으로 진행되여 왔다면 앞으로는 북과 남, 해외의 단체, 인사들과 피해자, 유가족들이 서로 련대, 협력하여 보다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운동을 벌려 나가야 할것이다. 우리는 더욱 더 단결되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맞받아 나감으로써 우리 민족의 단결된 위력을 보여 주어야 할것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통치가 끝장난지도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피해자들의 고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수많은 부모들이 《징용》,《징병》으로 일제에게 끌려갔다가 돌아 오지 못한 자식들을 부르며 눈을 감았고 한장의 사진을 놓고 유해도 남기지 못한 아버지,어머니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인지 모른다. 일본이 범죄적인 과거를 청산하지 않는 한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들의 고통은 영원히 계속될것이다. 우리는 조선민족의 존엄을 걸고 일본의 과거청산을 받아 내기 위한 운동을 적극 벌려 피해자들의 고통을 가셔 주고 우리 인민의 쌓이고 쌓인 원한을 반드시 풀어 주어야 할것이다. 5.우끼시마마루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 진행 북, 남, 해외 일본의 과거죄행추구에 공동보조 북, 남, 해외 대표들의 참가밑에 진행된 우끼시마마루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 북남, 해외가 한데 모여 1945년 8월 24일 일제의 식민지지배정책에 따라 징용으로 끌려 왔던 조선인을 귀환시키려고 했다가 마이즈루앞바다에서 폭발, 침몰한 《우끼시마마루》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평양토론회가 9월 29일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되였다. 이번 토론회는 6.15공동선언발표이후 강제련행, 국호표기문제 등 일본이 과거 조선민족앞에 저지른 죄행을 7천만 한겨레가 힘을 합쳐 해결해나가자는 북남, 해외의 공통된 의지를 과시하는 마당이 되였다. 토론회에서는 조선일본군《위안부》 및 강제련행피해자 보상대책위원회의 홍선옥위원장이 기조보고를 하여 《우끼시마마루》사건이 기뢰에 의한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일본군부당국의 계획적이며 의도적인 조작이였다는 근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다음 일제가 이런 폭파사고를 꾸민것은 《대동아공영권》의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된 분풀이와 앙갚음을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을 살해하는것으로 해보려 했다는것과 저들이 저지른 온갖 비인간적만행이 세상에 알려지는것이 두려워 산증인들인 조선인피해자들을 없애치우는 방법으로 범행을 숨겨보려 했다는데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어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실장, 박사인 공명성씨와 박사, 부교수인 리철홍씨(북측), 《우끼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전재진회장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특별연구원인 정혜경박사(남측), 진상조사단의 홍상진사무국장과 교또진상조사단의 류구채상임고문, 도꾜진상조사단의 리일만고문, 《전쟁과 녀성에 대한 폭력》일본네트워크 조사팀성원의 김영씨(해외), 고려대학교 아시아문제연구소의 안자꼬 유카씨(일본)들이 일본이 과거에 조선민족앞에 저지른 죄행들을 폭로하면서 최근 들어 군사대국화, 우경화의 길로 치닫는 현 일본정부의 움직임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였다. 토론회에서는 유엔인권고등판무관대리에게 보내는 편지와 일본정부에 보내는 편지, 북, 남, 해외단체들의 공동성명이 각각 채택되였다. 일본정부에 보내는 편지는 ①사건의 진상을 조사규명하기 위한 조치를 각방으로 취하며 조사자료를 전면공개할것 ②희생자들의 신분확인사업과 유골인도문제를 성의 있게 해결할것 ③조사확인된 자료에 기초하여 책임 있는 자들을 법적으로 엄격히 처벌하며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고 납득할만한 보상을 할것 ④ 가해자로서의 죄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피해자인 우리 민족을 적대시하는 온갖 행위들을 당장 중지하며 과거청산을 공약한 조일평양선언의 기본정신을 존중하고 성실히 리행하기 위한 실천적인 조치들을 취할것을 요구하였다. 62년만에 만난 형제가 증언 토론회에서는 북측에서 3명, 남측에서 1명의 강제련행피해자들이 증언하였다. 1944년 5월에 일본에 끌려갔다가 혹가이도의 오따루에서 수송선 《다이헤이마루》로 지시마렬도에 가는 도중 미군의 어뢰를 맞아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은 황종수씨(76살), 1944년 9월에 징병으로 일본에 끌려가 갖은 고생을 겪은 김용걸씨(77살)의 증언들은 일제의 만행이 얼마나 악착스러운것인가를 충분히 실감케 하였다. 이날 증언한 강제련행피해자인 북측의 백제인씨(76살)와 남측의 백수인씨(81살)는 강제련행으로 하여 62년간 생리별을 당하였다. 반세기이상 헤여졌다가 다시 만나 흐느껴우는 그들을 참가자들은 따뜻한 박수로 맞아주는 동시에 일제에 대한 치솟는 분노를 금치 못해하고 있었다. 올해 5월 30일, 오사까고등재판소는 《우끼시마마루》사건에 대해 국가의 책임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또한 일본의 우익세력과 언론들은 지난해 9월의 조일수뇌회담이후 저들이 과거에 저지른 반인륜적이며 범죄적인 과거사를 없애치우려고 랍치문제를 들고나와 더욱더 광란적으로 날뛰고 있다. 그러나 북남, 해외가 힘을 합쳐 일본의 과거청산문제에 나서게 된 이상 더는 버티지 못한다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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