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간송 전형필 선생의 탄생부터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건립까지 과정과 문화재를 수집하기
결심하게 된 과정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그 드라마틱한 과정과 일화를 중심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간송이 위창과 함께 문화재를 본격적으로 수집할 계획을 세울 무렵 아주 소중한 두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되는데 한 명은 의학도 김승현이었으며 또 한 사람은 위창의 소개로 알게 된 이순황이었습니다.
집안이 어려워 간송이 학비를 대었던 김승현은 간송보다 세 살 아래여고 이순황은 간송보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이 두 사람은 평생 간송이 형제처럼 의지했던 사람들인데 특히 이순황은 평생 간송 곁에서 집사처럼 움직여준 사람입니다.
간송은 북단장과 보화각을 세운 후 이순황을 비롯한 몇몇 사람을 앞에 내세워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는데 간송은 문화재를 구입할 때 절대 값을 깍지 않아 고서화 수장가들 사이에서 서서히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간송이 문화재를 구입할 때 값을 깍지 않은 이유는 문화재를 값어치 있게 보는 따뜻한 시선뿐 아니라
문화재를 보는 정확한 눈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주인이 제대로 가치를 몰라 값을 싸게 불러도 말없이 서너 배를 돈을 지불하곤 했기에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구하면 먼저 간송에게 보이려 했습니다. 간송이 수많은 일급 문화재를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이런 면모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간송은 관훈동의 유명하고 조선 말기에 세워진 가장 오래된 고서점 중 하나인 한남서림이 새 주인을 찾는다는 소문을 듣고 이순황을 통해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이곳을 창구로 문화재를 수집합니다.
간송 선생님이 수집한 문화재의 양의 비해 구입경로가 확인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본인이 문화재를 구입 후 남들처럼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입에 관여한 사람들에게도 철저히 비밀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러한 작업은 사전정보가 중요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한 치밀한 준비 그리고 문화재 구입 후
손상된 부분의 보수 및 표구 등 깔끔한 사후 처리까지 아는 사람이 많아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현재 구입동기와 전해지는 몇
가지 일화는 간송이 직접 생전에 지인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기에 100% 진실입니다.
[청화백자철사진국화문병](국보 294호)-경성미술구락부에서의 한판승
1936년 11월 어느 날 자주 거래하던 일본인 골동상점 온고당의 주인 심보는 급하게 간송에게 당시 조선저축은행장(제일은행의 옛이름)이면서 경성 최고의 고미술품 수장가인 모리고이치의 유품들이 경성미술구락부 특별전시경매에서 처분한다는 정보를 전달합니다.
그 후 두 사람은 명동의 한 음식점에서 만나 출품 사진들을 보며 구입할 목록을 선정하고 있었습니다. 사전에 미리 사진을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은 심보가 출품자들에게만 전해지는 정보를 얻기 위해 자기 물품을 몇 점 출품했기 때문입니다. 심보는 비록 일본인이었지만 그 동안 간송의 사람됨에 감복하여 간송의 거간꾼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많은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본 간송은 한 장의 사진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그 후 다른 사진들은 옆으로 밀어놓고 그 사진만 묵묵히 들여다보았습니다. 그것은 청화백자에 난초와 국화, 그리고 곤충이 그려져 있는 목이 긴 병의 사진이었습니다.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국보294호) 높이 42.3 . 목이 길지만 풍만한 몸체가
눈부시게 하얀색이고 그 흰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진사(붉은 색 광석에서 빼낸 안료)와 철사(장석을 주성분으로 산화철을 섞어 만든 흑갈색 물감)로
들국화가 그려져 있으며 푸른 청화 안료로 금방 날아 가버릴 듯한 나비가 새겨진 보기 드문 명품은 그렇게 우리 민족의 품에 안식을 찾은
것입니다.
“ 전선생. 제 뜻과 같습니다 그려” 심보는 자기의 뜻과 같다는 생각에 흥이 나서
말하면서 단연 그 백자가 경매 물품 중 최고임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드디어 경매일 11월 22일 경성미술구락부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간송과 심보가 들어서자 제법 많이 알려진 심보와 함께 들어서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희고 둥근 얼굴, 머리칼을 단정하게 뒤로 넘긴 젊은이가 누군지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심보는 경매장에서 일본에서 거물이 왔다는 소문이 누굴 말하는 건지 확인하던 중 소스라치게 놀라며 간송에게 야마나카가 왔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야마나키는 당시 교토에서 골동점을 운영하며 베이징, 런던, 파리, 뉴욕 등 세게 각 곳에 지점을
두고 있는 세계적인 골동 거상이었습니다.
드디어 경매는 시작되었고 물건이 소개될 때 마다 탄성과 수군거림이 일었고 몇 사람의 경합자가 나서서 값을 점점 올려 가고
있었습니다. 보통 백자가 오백 원에서 천원 안팎에서 거래가 되었으니 당시 군수의 월급이 칠십 원 정도이고,
천원이면 웬만한 기와집 한 채를 살수 있던 시절이었기에 조그마한 그릇 하나가 천 원 안팎에서 거래되었으니 그 열기가 가희 어댔을지 짐작 가고
남습니다. 아직까지 간송과 야마나카는 단 한번의 경매에도 참여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경매가 거의 종착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경매대 위에 눈처럼 흰 바탕에 국화와 난초, 풀과 곤충이 양각된 병이 올라왔을 때 실내는 물을 뿌린 듯이 고요해졌습니다. 드디어 경매는 시작되었고 오백 원부터 시작된 가격은 단숨에 오천 원을 넘어섰습니다.
“ 칠천 원 또 없습니까? “ 를 외친 후 사회를 보던 고하라가 경락봉을 집어 드는 순간 지금까지 침묵하던 심보가 소리쳤습니다.
“ 팔천 원” 실내는 갑자기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백 원 단위로 오르던 값을 단숨에 천 원을 올린 것입니다.
팔천 원을 두 번 더 외친 고하라가 경락봉을 집으려는 순간 한쪽 구석에서 “구천 원” 하는 소리가 들렸으니 바로 야마나카 였습니다. 그 후 심보가 다시 “일만 원” 하고 외쳤습니다. 이제 경매는 단순히 경매를 넘어서서 일본과 조선의 자존심 싸움을 상징하는
분위기로 넘어갔습니다. 그 뒤로 오백 원씩 오르던 금액은 경매 사상 최고가를 넘어섰고 일만 사천 원부터는 오십 원 단위로 바뀌었습니다.
아먀나키가 지친 듯 눈을 감고 외쳤습니다 “일만 사천오백오십 원 “
심보가 다시 외쳤습니다 “일만 사천 오백육십 원”
“ 일만 사천 오백칠십 원” 야마나카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불렀으나 이미 목소리는 힘이 빠져 있었습니다. “일만 사천 오백팔십 원” 심보가 마지막 일격을 가했습니다. 그 후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고하라의 경락봉이 힘껏 내리치는 순간 경매장은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상감청자운학문매병](국보68호)
이 이야기는 블러그에서(시간창고로 가는 길: 간송에서 단원을 만나다)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다시 한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조그마한 주둥이 바로 밑에서부터 풍만하게 부풀어다가 좁아들면서 흘러내리는 어깨 선이 유난히 아름다운 높이 42 cm 의 매병. 일명 천학매병은 천 마리의 학이 날아가는 모습이 새겨진 고려시대 최고의 청자로서 신창재라는 수집가가 도굴꾼에게 4천원에 구입 후 소장하고 있다가 일본인 수집상인 마에다에 고가에 넘긴 물건 이였습니다.
매병은 서서히 입소문이
났습니다. 실물을 본 골동상인 누구나가 가히 대적할 물건이 없는 명품이라는 것을 인정했기에 일본 골동상인은 물론 조선 총독부박물관까지 1만원에
사겠다고 제의했으나 마에다가 거절했습니다. 더 값을 올리려고 마에다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보가 이러한 이야기를 간송에게 들려주자 “물건을
봅시다” 라고 짤막하게 대답하고 바로 마에다 집을 향했습니다. 간송 선생님은 심보라는 일본 골동품업자를 통해 천학매병의 이야기를 듣고
마에다를 직접 찾아갑니다. 그 집에서 작품을 이리저리 돌아보면서 간송 선생님은 이 물건을 절대 일본인에게 소장하게 할 수 없겠다고 결심합니다.
도굴꾼들이 쇠꼬챙이로 땅을 찍어보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입니다.
“마에다상, 그래 어느 정도 쳐주면 되겠어요? ” 마에다는 머리를 굴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불러야 하나. 이 청년은 절대로 값을 깍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흥정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가!’
“2만원.”
“뭐요! 2만원?” 마에다의 말에 놀라 소리친
사람은 간송이 아니라 심보였습니다.
쓸만한 기와집이 2천원 이였으니 10채 값을 부른 마에다를 어찌 놀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간송은 처음 그대로의 목소리로 “심보상, 고생하셨습니다.
아직 현금이 덜 준비되었으니, 오늘은 5천원을 드리고, 나머지는 열흘 안으로 치르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어음을 써드리지요.” 바로
말하고 현금을 갖다 주었다 합니다. 물론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선친이 물려주신 땅 수백 마지기를 급매물로 팔아야 했습니다.
아무튼 물건을 판 마에다는 그 다음날 일본 최대의 골동품 대가인 무라카미가 그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한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했지만 이미 물건은 간송에게 넘어간 후였습니다.
무라카미는 한국에 오자마자 간송을 방문하였습니다. 한참 동안 천학매병을 감상하더니 넘겨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묵묵부답인 간송에게 가격이라면 부르는 데로 주겠다며 산 가격의 두 배인 4만원을 제시 했습니다. 간송에게 며칠 만에 엄청난 부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간송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뜨며 “넘겨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무라카미상이 이 천학매병보다 더 좋은 물건을 저한테 가져다 주시고 이 매병은 원금에 가져 가시지요. 저도 대가를 남만큼 치를 용의가 있습니다.”
하하하...이것보다 더 좋은 물건이 있으면 너보다 돈 더 많이 주고 사겠다. 그리고 이건 원금으로 주겠다는 응수.
조센징이라면 일단 깔보고 돈으로 해결하려는 일본인에게 이렇게 호쾌한 응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괴산외사리 석조부도](보물579호) – 돌도 우리 것이다
간송은 언제나 인천항을 통해 외국으로 반출되는 문화재에 대해 정보망을 갖추어 놓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문화재 반출은 특별한 일 아니라면 조용히, 비밀리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기에 사전정보를 입수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대부분 이순황이 맡았을 것입니다.
하루는 이순황이 급히 간송을 찾아와 급히 인천을 다녀오겠다고
말합니다.
“무슨 일이오? “
“충청도에 있던 고려시대 부도 하나가 일본인에게 팔려서 인천항으로 갔다고 합니다.
“어서 다녀오세요. 서둘러 주시지요” 간송은 두말 않고 선뜻 현금을
주었습니다.
이순황은 아름다운 부도가 배에 실리기 직전 부두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엄청난
액수를 물어주고 부도를 붙잡았습니다. 이 부도가 바로 간송미술관 야외에 서있는 괴산외사리석조부도(보물579호) 입니다. 팔각당형의 아름답고
깨끗한 형태로 연꽃무늬가 아름답게 조각된 걸작입니다.
<괴산외사리부도>
간송은 1935년에 이미 경북 문경의 한 절터에 서있던 오층석탑이 헐값에 팔려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운반 중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달려가서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 상하의 비례가 아름다워 안정감이 뛰어난
전문경오층석탑(보물580호)도 지금 간송미술관에 서 있습니다.
간송은 반출되기 직전의 석조유물만 구입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일본으로 넘어간 유물도
다시 되사온 경우도 있습니다. 하루는 이순황이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이미 일본으로 팔려 나가 오사카 경매장에 나온다는 정보를 간송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간송은 두말 않고
“이번에도 수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수고라니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지요”
“가격에 구애되지 말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낙찰을 받도록
하시지요”
이순황은 경매에서 어렵게 석탑을 찾아 돌아왔습니다. 조국에 돌아온 삼층석탑(서울시
유형문화재 28호)도 보화각 뒤뜰에 안식처를 얻었음은
당연지사입니다.
<삼층석탑> 앙련이 꼭 촛불같다.
3층의 옥개석 중 반전되는 일부분이 훼손되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아담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주는
석탑이다. 상륜부는 하나의 돌로 구성된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 있고, 그 이상의 것은 소실된 상태이다. 이 삼층석탑은 탑신의 초층 옥신이
2층과 3층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고, 옥개받침이 3단인 점 등 양식상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느 날 가까운 친구가 간송과 함께 보화각 뜰을 산책하다가 물었습니다.
“저 삼층석탑이 일본에서 돌아온 것인가?”
“그렇다네 일본의 재력가와 붙는 바람에 예상보다 돈이 많이 들었지. 그런데 막상 일본에서 실어다 놓고 보니 아주 가치 있는 것은 아니었네. 하지만 우리 석탑 하나를 되 싣고 왔으니 그것으로 된 거지 “
한번도 보지 않은 석탑을 무조건 되 사오게 했던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우리 문화재에 대해 깊게 사랑했는지 말해주는
일화입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무심한 눈빛으로 한번씩 힐끔 쳐다보았던, 아무 설명도 치장도 없이 나무들 사이에 서있는 부도와 탑, 석불들은 그렇게 하나씩 일본인의
손에서 되찾아온 유산들인 것 입니다.
[훈민정음](국보 70호) – 하늘이 보우하사
1942년 늦여름 간송은 오랜만에 한남서림에 들렀습니다. 언제나 이순황이 수시로 찾아와 정보를 전해주는 터라 굳이 찾아갈 이유가 없었음에도 이상하게 그날따라 어떤 힘에 이끌리듯 한남서림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한남서림에서 창 밖을 보던 간송은 평소에 옛 서적을 거간하기로 유명한 골동상인 하나가 하얀 모시 두루마기의 나들이 옷을
입고 서둘러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순황을 시켜 무조건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일렀습니다.
잠시 후 이순황을 따라 들어온 골동상인에게 “ 그리
부지런히 어디를 가는 길이오? 더위나 좀 식히고 가시구려 ”
간송이 웃으며 말하자 그 사람은 조금 머믓거렸지만 “ 뭔가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 라고 묻는 간송의 탐문에 그만 실토를 하고 말았습니다.
“실은 지금 경상도 안동에서 기막힌 물건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기막힌 물건이라… 물론 서적이겠지요?
“예 아주 큰 물건입니다”
“어서 이야기하시지요” 이순황이 답답하다는 듯
재촉했습니다.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 합니다”
갑자기 간송은 숨이 멎는 듯 했고 머리가 갑자기 하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찍어낸 훈민정음 원본. 존재했다는 것 만 전설처럼 내려온 훈민정음 원본이
나타났다니..
<훈민정음 원본>
국보 지정 논란 때마다 국보 1호로 재지정 되어야 한다는 논란을 일으키는 훈민정음.
조선왕조신록과 더불어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 있다.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고 국내 유일본이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의 발견으로 그 사실이 증명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는데 구강 원리를 기초로 창제 되었음이 증명되었다.
당시 1942년도는 전황이 나날이 고조되어 일본이 극도로 예민한 시기였고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난 해입니다. 일제가 우리말을 금지하자 조선어학회는 서둘러 우리말 사전을 편찬하려 하다가 한글학자 33인이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고 역사를 연구하는 연구 모임인 진단학회가 강제 해산되었던 해입니다. 그런 시절에 훈민정음이 나타나다니.. 일본인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떨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책 주인이 일천 원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돈 구하러 가는
길입니다”
간송은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했습니다.
“나와 여러 번 거래해봐서 아시겠지만 물건은 제 값을 주고 사야지요”
그리고 선뜻 일만 일천 원을 전해주면서
“책 주인에게 일만 원을 전하세요. 그리고 일 천원은 수고 비로
받으세요”
이렇게 해서 훈민정음(국보70호)은 일제 치하에서 무사히 보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가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간송이 아니었으면 그 누가 그렇게 큰 돈을 내어 투자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후 간송은 세종 때 발간한 동국정운(국보 71호)과 거문고 악보인
금보(보물283호)등을 구입하는데 하늘이 보우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러한 유물들이 일제 치하에 살아
남았겠습니까…
이밖에도 아궁이 속에서 건져낸 혜원 신윤복의 [해악전신첩]등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너무
길어져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점점 종착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다음편에는 6.25 전란을 이겨낸 기적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왜 제가 간송의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저의 속마음을 말입니다.
참고문헌 :[간송문화] 41호- 간송선생 평전
[간송문화] 51호- 간송이 문화재 수집하던 이야기
[간송문화] 55호- 간송 전형필과 위창 오세창
[간송문화] 70호- 간송 전형필
[간송선생님이 다시찾은 우리문화유산이야기] 한상남 도서출판 샘터
[위창 오세창] 이승연 도서출판 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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