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옵니다. 알싸한 차가움이 코끝을 자극하지만 구수한 숭늉 맛 같은 황태덕장냄새가 문풍지 바람처럼 코끝으로 불어옵니다. 킁킁거리는 콧방울을 따라 치켜든 시선 끝에 황태덕장이 펼쳐집니다.
바람이 스키를 타듯 거침없이 지나갈 수 있는 탁 트인 비탈, 활주로처럼 매끈한 언덕배기 중간에 있는 덕장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황태들이 누런 빛깔로 구수하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푹푹 빠지는 눈밭을 걸어 황태덕장으로 다가갑니다. 잘 익은 김치처럼 수북한 눈들마저 적당히 익었습니다. 설익어 뽀드득거리거나 사각거리지도 않고, 너무 농익어 물컹거리지도 않으니 눈길을 걷기에 딱 좋게 적당한 촉감으로 발자국을 맞이합니다. 눈들이 장난을 칩니다. 두 손으로 물을 뿌리며 물장난이라도 치듯 쏟아지는 햇살을 반사경처럼 담아내며 눈앞을 부시게 빛 장난을 칩니다.
황태덕장이 가까워질수록 구수한 맛이 진해집니다. 멀찍이서 맡았던 황태냄새는 밥알이 붙어 있고 촉촉함이 남아 있는 그런 누룽지 맛이었지만 성큼 다가간 황태덕장에서 나는 황태냄새는 솥바닥 누룽지, 무쇠 솥바닥에서 박박 긁어낸 누룽지처럼 노란 빛깔에 오도독거리는 맛을 내는 그런 누룽지 맛이었습니다.
덕목 사이로 꾸둑꾸둑해 보이는 황태 몇 마리가 눈에 띕니다. 밤나무 아래 알밤이 떨어져 있고, 사과나무 아래 사과가 떨어져 있듯 황태덕장 눈밭에는 황태 몇 마리가 이삭처럼 떨어져 있었습니다.
가지런하게 매진 덕목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야 할 황태가 뽀얀 눈밭에 네 마리 씩이나 떨어져 있습니다. 발목이 푹푹 빠질 만큼이나 쌓인 수북한 눈밭에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으니 사람이 아닌 바람의 흔적임을 금방 알겠습니다.
이삭을 줍거나 찬장 밑에서 숟가락이라도 줍듯 떨어진 황태를 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져가려고 챙기기 위해서 줍고 싶은 게 아니라 걸어 놓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덕장에 사람의 흔적을 남김으로 주인에게 의심의 고통을 남길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찬장 밑에 떨어져 있는 숟가락이 부엌의 숟가락이듯 덕목에서 떨어져 있는 황태 역시 덕장의 황태가 분명하니 말입니다.
덕목에 매달려 있어야 할 황태를 누가 떨어뜨렸을까를 생각합니다. 바람이 그랬을 겁니다. 지나가던 바람이 심통이라도 부리듯 가지런히 매달려 있는 꾸러미들을 흔들어 대니 끝자리에 있던 황태가 바람에 날려 나뒹군 모양입니다.
어쩌면 냄새만으로 맛보는 황태의 구수함에 반해 그 부드러운 속살이라도 만져보려 한껏 욕심을 내다 떨어트렸는지도 모른단 생각입니다. 불어오는 바람과 내려쬐는 햇살에 속살까지 노랗게 익어가던 황태가 바람의 심술을 만나니 이렇듯 떨어진 알밤처럼 눈밭에 뒹굴게 됩니다.
고운 한지처럼 수북한 눈들이 하얗게 깔려 있는 덕장, 덜 녹은 눈덩이를 고깔모자처럼 덮어쓴 황태들이 누룽지 빛깔로 구수하게 익어갑니다. 속살까지 구수한 누룽지 빛깔로 익어가고 있는 황태 뒤에는 알싸한 바람과 따뜻한 바람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어쩜 이렇듯 얼고 녹음을 반복할 때 각질처럼 딱딱해진 삶의 속살이 저절로 부드러워질 수도 있고, 우러나는 살맛이 구수해질지도 모른단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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